잉카 최후의 날 (킴 매쿼리, 2010)

책소개
에스파냐인이 잉카를 정복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우리가 단순히 역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갔다고 생각하는 잉카 문명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며 잉카인과 에스파냐인들이 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비교, 분류한다. 저자는 페루에서 아마존 강 유역에 거주하던 요라Yora라는 부족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잉카 제국을 기억하는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1000만 명이넘는 인구를 거느리던 대제국 잉카가 몰락한 이유를 보여준다. 남미에는 소와 말같이 흔한 동물이 없었고, 강철과 총이 없었다는 것과, 문자가 부재했다는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황금에 대한 인간의 욕망, 외부의 적보다 황위를 빼앗으려는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한 잉카의 황위 다툼 등 팽팽한 갈등 관계도 담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다양한 이야기들, 잉카의 어린 황제가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 병사들과 맞서 싸웠다는 것, 아마존 밀림 속에 비밀의 도시 빌카밤바를 세운 뒤 그 곳에서 약 36년 동안 게릴라 전쟁을 했다는 것 등을 보여준다. 저자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에스파냐군과 잉카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하며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목차
연표
지도
추천의 글
저자 서문
1. 발견
2. 무기를 든 기업가
3. 안데스 산맥의 초신성
4. 제국의 충돌
5. 황금이 가득한 방
6. 황제를 위한 진혼곡
7. 꼭두각시 황제
8. 반란의 전조
9. 위대한 반란
10. 안데스에서의 죽음
11. 외눈박이 정복자의 귀환
12. 안티스의 영역
13. 빌카밤바: 게릴라 도시
14. 피사로 형제들의 최후
15. 잉카의 마지막 저항


출판사 제공 책소개


피사로의 잉카 정복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1,000만 인구를 거느린 잉카는 정말 168명의 피사로 군에 의해 멸망했는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잉카는 정말 저항조차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부족이었는가?
승자의 기록 너머에 숨어있던 잉카의 진실을 추적한다!

1532년 11월 16일,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68명의 스페인 군대는 남아메리카의 카하마르카에서 8만 명의 잉카 군과 맞선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 스페인 군은 7,000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다. 태어난 지 90년 밖에 안 된 제국의 싹을 싹둑 잘라버리게 되는 스페인과 잉카의 첫 충돌, 16세기 두 나라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이럼 빙엄 이후 잉카 문명에 관한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잉카 최후의 날》의 저자 킴 매쿼리는 승자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잉카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균형 있게 조명해 내고 있다. 아마존 강 유역에서 잉카 제국을 기억하고 있는 요라yora라는 부족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사료를 접하게 된 저자는 잉카와 스페인 양측의 시각에서 쓰인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하고 분류하고 차례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첫 식민지 정책을 펼친 정복자들과 잉카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잉카원주민들의 치열한 삶을 똑같은 무게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남아메리카에서 초신성처럼 출현한 잉카와 그 광대한 땅을 보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던 여러 잉카 황제들의 족적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침략으로 잉카가 허무하게 몰락하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역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잉카 문명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을 지적하며 우리가 몰랐던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잉카의 어린 황제가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스페인 병사들과 맞서 싸웠다는 것, 그들을 거의 소탕할 뻔했었던 것, 아마존 밀림 속에 들어가 비밀의 도시 빌카밤바를 세운 뒤 그곳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며 약 36년 동안 치열한 게릴라전을 계속해나갔다는 것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페인군과 잉카군의 전투까지 새롭고 신선한 시각으로 전하고 있다.
여기에 황금에 대한 인간의 욕망,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신세계를 차지하기 위해 피사로 형제들과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벌이는 싸움, 외부의 적보다 황위를 빼앗으려는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한 잉카의 황위 다툼 등 국가와 국가 간의 큰 전쟁 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팽팽한 갈등관계까지 상세하게 그려낸다.
저자는 시간의 족적을 따라 전개되는 연대기식 해설을 따르고 있지만 정보만 주고 사라지는 건조한 역사 서술을 부정하고, 역사 속 실제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신세계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지, 잉카는 왜 빌카밤바에서 부활을 도모하는데 실패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 주고 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1522년 피사로는 잉카에 한번 들어갔던 경험이 있는 탐험가로부터 잉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침 그때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소식을 듣고 흥분해 있던 피사로는 즉시 잉카 제국의 정복을 결심한다.
1524년 그의 첫 번째 원정대가 파나마를 출발, 콜롬비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 1526년의 두 번째 원정에서는 금과 라마, 인디언 몇 사람을 데리고 귀환하는 데 그쳤다. 1528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여왕으로부터 페루 정복에 대한 권리를 허락받는다. 1531년 피사로는 세 번째 원정을 떠나는데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마침내 피사로 군은 1532년 11월 15일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다음날 피사로의 요구에 의하여 아타우알파 황제는 대군을 배후에 남겨둔 채 5000명만을 데리고 피사로와의 회견을 위해 찾아온다. 피사로는 이 기회를 노렸다. 아타우알파 황제와 그의 비무장 보위대에 대하여 피사로는 공격을 명령했다.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고 그것도 겨우 30분 만에 끝났다. 스페인 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피사로의 전략은 적중했다. 잉카 제국은 중앙집권제여서 모든 권위는 반신으로 추앙되는 잉카 또는 황제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 황제가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원주민 부대는 침입해 오는 스페인 군에 반격을 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몸값으로 방 한가득 황금을 채워주겠으니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황금을 챙긴 뒤 피사로는 2~3개월 뒤에 황제를 처형하고 말았다.
1533년 11월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지 1년 만에 피사로는 한 번의 대접전도 없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무혈입성 했다. 거기에서 피사로는 자신의 꼭두각시 황제로 망코 잉카를 추대한다. 1536년 망코 잉카 황제가 도주하여 스페인 군에 대한 반란군을 결성했다. 반란군은 한때 스페인 군을 리마와 쿠스코에서 포위하기도 하는 등 선전했으나 그 다음해에 바로 진압당했다.
잉카 반란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도중에 피사로는 정복군 동지와의 갈등으로 내부분열까지 겪게 된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협력자 알마그로가 결국은 피사로와의 불화로 반란을 일으켜 자기 몫의 전리품을 요구하다가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처형으로 반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541년 알마그로를 지지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리마에 있던 피사로의 궁전에 잠입하여 66세의 노지도자를 살해했다. 피사로가 쿠스코 시에 입성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잉카가 몰락한 진짜 이유
장장 4,000킬로미터가 넘는 대륙에 1,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거느리던 대제국 잉카가 완전히 몰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남미에는 불행하게도 소와 말같이 구대륙에는 흔한 동물이 없었다. 기껏해야 길들이기 힘든 야마와 고급 의류의 원료인 비쿠냐, 알파카 등이 전부였다. 오랫동안 가축들과 함께 생활해온 구대륙인들은 이들이 옮기는 병균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다. 구대륙 사람과 접촉하여 죽은 신대륙인의 절대 다수는 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결국 길들일 짐승이 별로 없었던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2. 잉카가 멸망한 또 다른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강철과 총의 부재였다. 은광과 금광은 많았지만 정작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광은 드물었고 그 결과 무기는 석기시대 수준을 넘지 못했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화력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3. 잉카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키푸는 밧줄과 끈의 매듭을 이용하여 정보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스페인 사람들보다 정보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전투가 발생했을 시 의사소통을 주고받기도 어려웠다. 잉카인들은 국경선 너머 세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스페인이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 연안을 점령한 사실도 몰랐으며 유럽이나 나머지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적을 알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잉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4. 스페인이 들어오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잉카는 안데스 산맥 기슭에 살던 조그만 부족의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15세기 초 파차쿠티 대에 와서 주변 부족을 정복, 에콰도르에서 칠레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잉카에 무릎 꿇고 조공을 바쳐야 했던 수많은 부족들은 이들의 폭정에 반발, 스페인 군대가 오자 반 잉카의 선봉에 섰고 이것이 잉카 몰락을 앞당긴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나는 잉카 최후의 날, 그 치열했던 전투의 서막
잉카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했는가? 스페인 정복자 군대가 그렇게 강했는가? 라는 의문이 들 때쯤 저자는 잉카전사들과 스페인 군대의 무기를 상세하게 비교 설명해 준다. 20만 잉카 전사들이 채 200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 허무하게 당할 수 있나? 라는 물음에도 사료를 제시하며 빌카밤바를 중심으로 펼쳤던 36년여의 게릴라전까지 수많은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준다.

첫 번째 충돌: 카하마르카 전투
1532년 11월 16일 토요일 아침, 카하마르카의 광장 안에는 무장한 스페인 병사 168명이 있었다. 그들은 건물 안에 숨어 잉카군이 광장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아타우알파 황제와 그가 이끄는 5,000~6,000명의 잉카군이 출입구가 두 개밖에 없는 광장 안에 들어서자 광장이 금세 복잡해졌다. 보병, 기마병, 포병으로 나뉘어 있던 스페인군은 공격신호가 울리자 한 명이라도 더 죽일 태세로 날카로운 단검과 장검, 창을 휘두르며 잉카인들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스페인 병사들이 잉카군을 한방에 쓰러뜨리자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잉카인들은 좁은 광장 입구로 몰려들었고 서로 밟고 밟히며 탈출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잉카군은 당황한 나머지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전멸했고, 아타우알파 황제도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생포되었다. 거대 제국 스페인과 잉카의 첫 충돌은 이렇듯 허무하게 끝이 났고 이때부터 잉카인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_4장 제국의 충돌

저항의 시작: 쿠스코 전투
스페인인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 자리에 오른 망코 잉카. 그러나 그들이 끝없이 황금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망코의 아내이자 잉카의 여왕인 쿠라 오크요까지 요구하자 드디어 스페인인들을 잉카 땅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한다. 잉카군 20만 명을 모아 쿠스코를 포위한 망코 잉카는 1536년 5월 6일, 쿠스코를 지휘하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들,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 곤살로 피사로를 포함한 196명의 스페인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돌과 창, 활을 퍼부으며 스페인군을 몰아붙이던 잉카군은 짚으로 만든 지붕에 불을 붙이며 적들을 더욱 큰 궁지로 몰아넣었다. 맹렬한 잉카군의 공격에 밀리던 스페인군은 순투르 우아시와 아툰 칸차라는 두 건물에 고립되고 만다. 지붕에 불이 붙어 싸우지 않으면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던 스페인군은 죽기 살기로 잉카군과 맞서고 강철 투구와 갑옷으로 공격을 막고 날카로운 강철 칼로 공격해 “한번 공격할 때마다 원주민들이 150명에서 200명을 쓰러”뜨렸다. 잉카군의 수가 월등히 많았음에도 전쟁이 벌어지면 늘 잉카군에는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스페인 군대에는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쿠스코 전투 후 원주민 사망자 수는 2,000명에서 4,000명까지 늘었으나 스페인군의 사망자는 대략 35명 정도에 그쳤다. 스페인군은 이런 전쟁무기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자신들 편에 붙은 원주민 동맹군들의 협조를 받으며 쿠스코를 지켜나갔다. 수십 만 명의 전사들을 모아 9개월간 쿠스코를 포위하며 공격했지만 결국 200명이 채 안 되는 스페인군을 무찌르지 못하고 결국 잉카군은 쿠스코에서 철수하고 만다.
_9장 위대한 반란

잉카의 승전: 키소 유판키 장군의 등장
1536년 5~6월 두 달 동안 스페인의 전운은 곤두박질쳤고, 잉카의 사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스페인군이 4년 전 페루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잉카의 한 장군이 네 개 부대를 섬멸했다. 그 잉카 장군의 이름은 키소 유판키였다.
유판키 장군은 스페인 군대의 우수한 기동력과 속도가 무기력해지는 험한 지형에서 공격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단 스페인 병사들이 깊고 좁은 협곡으로 들어가도록 놔둔 다음 잉카의 대군으로 입구와 출구를 막았다. 그리고 언덕바지에서 커다란 돌들을 아래로 마구 던져 전멸시켰다.
망코 잉카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유판키 장군에게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있는 리마를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해안 도시인 리마에서는 언덕을 이용할 수 없어 기마대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닷새 동안 리마를 포위해 공격하던 유판키는 리마를 빨리 파괴하고 돌아가 망코 잉카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직접 공격을 이끌고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하지만 평지로 들어온 잉카군은 스페인 기마대에 패하고 유판키 장군 또한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잉카와 스페인 전술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잉카 중군과 그의 사령관들이 앞에서 공격을 이끈다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앞에서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는데 이는 공격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에 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스페인 사령관들은 보통 뒤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결국 유판키 장군은 앞에 나서 전사들을 지휘하다 공격당해 사망했고, 사령관을 잃은 전사들은 사기를 잃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_10장 안데스에서의 죽음

게릴라 전투
망코 잉카는 스페인군을 피해 안데스 고원에서 내려와 지대가 낮은 열대우림 속 빌카밤바에 새 수도를 건설한다. 비록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는 스페인 침략자들을 잉카 땅에서 내쫓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망코 잉카는 자신을 따르는 잉카 사람들에게 파발을 보내 스페인군에게 저항하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망코 잉카는 불과 몇 년 전과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쿠스코를 함락하기 위해 소집했던 만큼의 대규모 군대가 없었다. 그의 군대는 훨씬 작아졌고, 그 규모 때문에 스페인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따라서 망코의 전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잉카의 주 도로를 지나는 스페인 사람들을 공격한 뒤 재빨리 사라지는 방법을 택했다. 따라서 잉카 원주민들은 리마나 그밖에 다른 지방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스페인 상인들을 공격해 물건을 빼앗고 상인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뒤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망코는 스페인군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간헐적인 게릴라 전투를 벌이지만 반란의 기세는 점점 약해져만 갔다.
_13장 빌카밤바: 게릴라 도시

잉카 최후의 저항
망코 잉카가 암살당한 뒤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팍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당시 사이리 투팍은 겨우 아홉 살이었기 때문에 그 뒤 십 수년간 섭정이 행해진다. 스무 살이 되어 섭정에서 벗어난 진정한 왕이 되었을 때 사이리 투팍은 스페인군에게 저항하기는커녕 그들의 회유에 넘어가 빌카밤바를 버리고 쿠스코로 떠나버린다. 그 뒤 황제가 된 망코 잉카의 또 다른 아들 티투 쿠시는 잉카의 부활을 꿈꾸며 다시 세력을 규합하지만 병에 걸려 갑자기 죽고 만다. 티투 쿠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투팍 아마루는 스페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빌카밤바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폐쇄적인 정책을 펼친다. 새롭게 페루의 부왕으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어떻게든 잉카의 독립 왕국을 없애리라 결심하고 빌카밤바로 쳐들어가 도망치는 황제 부부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결국 1572년 9월, 망코 잉카가 반란을 시작한 지 36년 만에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세상을 뜨면서 잉카 반란의 싹이 뿌리 채 뽑히게 된다.
_15장 잉카의 마지막 저항

피사로가 잉카로 간 까닭은?
황금을 찾아서
잉카의 불운은 그들이 갖고 있던 황금과 은이 우연히도 16세기 유럽의 통화 단위와 똑같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금의 가치가 대략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려면 1530년대 스페인 선원의 평균 임금을 살펴보면 된다. 당시 선원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가는 대가로 대략 1년에 평균 금 2분의 1파운드를 받았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금 4파운드로 작은 범선 한 척을 살 수 있었고, 바다에서 20년 동안 뼈 빠지게 고생하면 금 1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카하마르카 전투에 참여했던 기병이 각각 은 180파운드와 22.5캐럿의 금 90파운드를 하사받았으니 신세계 정복에 나가면 일반 선원의 180년 치 봉급은 너끈히 넘는 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들에게 ‘정복’이란 모험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업’이었다. 사람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이들은 무기를 손에 든 기업가였다. 이들은 빼앗은 잉카 제국의 보물과 예술품들을 뜨거운 용광로 속에 던져 네모난 금괴로 바꾸어갔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잉카의 금은 제품들이 희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분상승을 꿈꾸며
구두 수선공, 재단사, 선원, 대장장이, 목수, 상인 등 스페인에서 낮은 신분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잉카를 정복한 뒤 잉카 계급피라미드의 상위권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에 있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신세계로 떠나는 배 위에 올랐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피사로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척박한 지역인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이었던 피사로는 촉망받는 기마대 대위였던 아버지와 농부출신 하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피사로는 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 수 없었고, 장남으로서 공식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소유지도 물려받지 못했다.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한 출생의 상처와 소년 시절 으리으리한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 때문에 피사로의 야망은 점점 더 커졌고, 그 야망 덕분에 피사로는 대륙과 신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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