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사람 - 다니구치 지로 마지막 대담

책소개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 지로 다니구치가 죽기 전 인문학자 브누아 페터스와 오랜 기간 대담한 내용을 

풍부한 이미지 자료와 함께 작고 3주기에 맞춰 책으로 출간했다. 

다니구치는 이 책에서 40여 년간 발표한 작품들의 창작 과정을 하나하나 밝히면서 

발상과 기획의 배경, 화면 구성, 대사와 지문 배치, 인물 설정과 배경 처리, 심지어 

의성어 그래픽 삽입 방식이나 협력자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 등 지극히 세부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밝힌다.

 

 

목차
0. 서문.................03
1. 수습기.................11
X. 클로로포름.................9
2. 전문 만화가.................47
3. 작가의 길.................71
4. 일본 만화, 유럽 만화.................105
5. 다니구치 스타일.................137
6.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161
7. 작품 및 주석.................187


행복했던 만화가의 삶 이야기, 최상의 만화 수업 - 3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다니구치 지로를 추모하며

2017년 2월 11일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 지로 다니구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인문학자 브누아 페터스와 오랜 기간 대담한 내용을 풍부한 이미지 자료와 함께 작고 3주기에 맞춰 책으로 출간했다. 동양 만화가 최초로 앙굴렘 만화 페스티발에서 두 차례나 수상한 다니구치는 이 책에서 40여 년간 발표한 작품들의 창작 과정을 하나하나 밝히면서 발상과 기획의 배경, 화면 구성, 대사와 지문 배치, 인물 설정과 배경 처리, 심지어 의성어 그래픽 삽입 방식이나 협력자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 등 지극히 세부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밝혀 이 책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실제적이고 효과적이고 고급스러운 만화 창작 강의를 담은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지향하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지만, 그가 삶에서 찾았던 작은 행복에 대한 성찰과 창작에 대한 열정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동서양 만화 세계를 이은 당대 최고의 만화가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지로 다니구치가 『열네 살』로 최우수 시나리오 상을 받았을 때 전 세계 만화인은 깜짝 놀랐다. 당시 그는 일본에서도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고, 서양 만화계에서는 애초에 일본 만화를 무시하고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니구치는 2년 뒤에 앙굴렘에서 『신들의 봉우리』로 또다시 최우수 작화상을 받았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됐으며 대표작 『열네 살』은 영화로 제작됐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동양 만화’를 서양 만화계에서 제대로 인정받게 한 작가이며 서양 그래픽노블의 특징과 기법을 동양 만화 세계에 녹여낸 작가였다. 그렇게 그는 동서양 만화가 실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공적으로 교류하게 한 살아 있는 전범이었다.
이 책은 자크 데리다, 폴 발레리, 에르제 등에 관해 저술한 인문학자이며 그래픽노블 시나리오 작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브누아 페터스가 장기간 지로 다니구치를 인터뷰한 내용을 풍부한 사진 자료, 발췌한 작품 사진 등과 함께 편집해 출간한 대담집이다. 시골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다가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도쿄로 올라와 유명한 만화가의 조수로 경력을 시작한 다니구치. 만화가 지망생 그의 삶이 이후 어떻게 펼쳐졌는지,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가 됐는지, 평생 만화밖에 몰랐던 그의 열정은 어떤 신념으로 불타올랐는지 독자들에게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흥분을 안겨준다.

만화 창작의 실제와 설명

서점에서 만화 관련 이론서나 평론집은 물론이고 만화 창작에 관련된 실용서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전자 장비를 이용하는 웹툰이 대세인 오늘날 연필과 펜, 붓으로 인물과 배경을 그리고, 칸을 나누고 채우던 전통적인 만화 창작 방식을 포기하거나 경시하는 창작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웹툰이 때로 ‘천만 관객’ 영화로 탄생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제9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만화는 영화만큼이나 정교하고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젊은 시절부터 탐정만화, 성인만화, 동물만화, 권투만화, 음식만화, 등산만화, 괴물만화 등 온갖 장르의 대중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역사만화, 문학만화, 철학만화 같은 성찰적인 작품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다니구치는 대담자 페터스의 질문에 따라 자기 작품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예리하게 분석하며 그 작법까지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다양한 시각 자료와 함께 다니구치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을 기획할 때 핵심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서사 구조를 어떻게 구성하고, 시나리오를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 어떤 원칙을 세우는지, 어떻게 인물의 감정 표현을 가시화하고, 배경에 지극히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말풍선과 지문은 어떤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대사가 전혀 없는 만화에서 감정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마치 친절한 선배 만화가가 후배에게 자기만의 비밀을 공개하듯 깨알 정보들을 상세히 들려준다는 데 있다. 게다가 만화를 읽는 기쁨을 주었던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발췌한 풍부한 작품 이미지와 그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성공한 작가가 된 삶의 여러 국면을 보여주는 빛바랜 가족사진부터 유럽 만화가들과 함께한 사진까지 그의 인생을 담은 사진들은 독자에게 흔치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만화 분야에서 일하거나 만화가를 꿈꾸는 창작자는 물론 만화를 즐기는 일반인에게도 눈이 번쩍 띄는 흥미로운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예술가의 소명과 행복

이 대담집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나서도 감흥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만화가로 살아가면서 삶의 여러 국면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겸손하고 진솔한 자세가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인 듯하다. 그가 당대 유명 만화가들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힘겹게 일하던 시절 만화에 미쳐 만화만을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만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을 때나 새로운 대작에 도전했을 때, 심지어 야심차게 준비했던 작품이 실패했거나 협력자들과 갈등을 빚게 됐을 때에도 그가 품었던 신념과 각오를 되새기는 장면은 만화와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에게는 삶에서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삶을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가는 자세, 많은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도전하고, 늘 창작하는 열정에 불타는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대담자 브누아 페터스가 그에게 ‘지니 같은 요정이 크든 작든 운명을 바꿀 수 있게 해주겠다면 무엇을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담담히 대답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요. (...)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즐거움 덕분에 제가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엄청난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 이미 제가 희망할 수 있었던 모든 걸 넘어서 인정받았습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되도록 자유롭게 작업하고 싶습니다. 제겐 그게 더 중요합니다. 어쩌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성공하겠다는 욕심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절 자극하는 것은 더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제게 정말 중요한 만화를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