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 요약

시나리오/역사|2019. 11. 23. 10:30

작가 소개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남부의 도시 할리카르나소스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릭세스,

어머니의 이름은 도리오 였다고 한다. 테오도로스라는 형제가 있었고 
또한 당시 유명한 서사시인이었던 파니아시스는 그의 종형제(從兄弟)였다 한다. 
다른 전승(傳承)에 의하면 어머니의 이름이 로이오였다고도 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도리오의 오기(誤記)라는 설이 유력하다.

종형제 또는 숙부에 해당하는 파니아시스는 당시 가장 뛰어난 서사시인으로서

그 이름을 널리 드높이던 사람으로, 오늘날에는 그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작품 이름 몇 가지는 전해지고 있다. 

 

헤로도토스가 그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그에게서 적지 않게 물려받았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의 긴 여행이 이 귀국 후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444년경 투리오이 이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중

수차례에 걸쳐 계속됐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 연대나 기간에 대한 상세한 것은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아테네에 상당히 오래 체류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망 연도가 적어도 기원전 430년 이후였다는 것은 <역사>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언급한 곳이

몇 군데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의 틀림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생연도도 마찬가지로 넓게 잡아 기원전 490~480년으로 보고 양극을 취하면 
기원전 490~420년이 그의 생존 기간이고 70세에 사망한 것으로 된다.

 

작품소개
헤르도토스 자신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글을 작성했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표명하고 있는 바이며, 
이 책의 확실한 사실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구비 전설이라든지, 풍문, 전승 등에 기초를 둔 것이다.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제2권에 있어서의 이집트와 제4권에 있어서의 스키타이의 풍토 및 습속에 대한 기술과 같이 
각각 독립된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지지적(地誌的) 서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청중 혹은 독자에게 별다른 위화감을 주지 않는 것은 결국 튼튼한 뼈대가 전편을 지탱하고, 
그것이 종종 보이는 탈선이나 정체에 동요를 보이지 않는 안정감이 높은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 전편에 통해서 신탁이나 예언이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줄거리 요약
1권

제1~5장 서언. 그리스인들과 이방인들의 불화 사례 
제6~94장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지배 
제6~7장 크로이소스와 리디아의 초기 왕들 
제8~15장 크로이소스의 조상 기게스의 지배 
제16~25장 알리아테스의 지배 
제26~28장 크로이소스의 정복 활동 
제29~33장 크로이소스와 솔론 
제34~45장 크로이소스의 아들 아티스 사망 
제46~55장 크로이소스와 델포이 신탁 
제56~58장 펠라스기아인의 내력과 언어 
제59~64장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제65~68장 스파르타의 상황: 정치 개혁과 테게아 전쟁 
제69~70장 리디아와 스파르타의 동맹 체결 
제71~85장 크로이소스의 페르시아 원정과 패배 
제86~92장 크로이소스와 키로스 
제93~94장 리디아의 관습과 문화 
제95~216장 페르시아 왕 키로스의 지배 
제95~107장 메디아의 지배자들 
제108~30장 키로스의 탄생과 양육. 메디아 멸망과 키로스 즉위 
제131~40장 페르시아의 관습과 문화 
제141~77장 키로스의 이오니아, 소아시아 정복 
제178~87장 바빌론의 도시 구조와 성벽 
제188~92장 키로스의 바빌론 정복 
제193~200장 바빌론 지역의 관습과 문화 
제201~14장 키로스의 마사게타이 원정과 키로스의 죽음 
제215~16장 마사게타이인의 관습과 문화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헤로도토스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에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 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 (특히 어떤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 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다. 

- 호메로토스의 의도

* 인물소개
칸타울레스 - 헤라클레스가의 마지막왕, 그의 신하인 기게스에게 왕위를 빼앗김

기게스 - 칸타울레스의 총명받는 신하로 충성을 다한다. 
나중에는 칸타울레스의 왕비와 짜고 칸타울레스를 왕위에서 내리고 
그 자리에 올라가며 메름나드가의 왕조 시대를 연다

크로이 소스 -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여러 도시를 정복하였으며, 
정복 이후에도 여러 도시와의 관계가 좋아 델포이 등 각지의 신전(神殿)에 많은 재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동방의 전제왕(專制王) 중 그리스 문헌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사람 중의 한 사람,

성격이 거칠고 가혹하게 통치를 함

솔론 - 그리스 7현인(七賢人)의 한 사람으로서, 명문이지만 중류 재산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살라미스섬의 영유를 둘러싼 메가라인(人)과의 싸움(BC 596)에서 명성을 얻은 결과, 
BC 594년 접정관 겸 조정관로 선정되어 정권을 위임받았다. 
당시 빈부의 극심한 차이에서 빚어진 사회 불안을 개선하기 위하여 
‘솔론의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부채의 조정 포기’와 ‘채무 노예의 해방과 금지’를 단행하여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힘썼다.

아스티아게스 - 메디아의 마지막 왕, 
딸의 아들(키루스)를 죽여서 자신의 왕권을 계속 유지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키루스로부터 추방당함

만다네 - 키루스의 어머니 이자 아스티아게스의 딸

하르파고스 - 메디아인으로 아스티아게스의 훌륭한 신하였다. 
하지만 후에 키루스와 함께 아스티아게스를 추방시키는데 공헌을 함

키루스 - 만다네의 아들로서, 지혜롭고 총명받는 젊은이, 후에 외할아버지를 추방하고 왕이됨

아드라스포스 - 고르디아스의 아들이자 마다스의 손자, 실수로 형제를 죽이고 페르시아 지역으로 도망쳐옴

* 리디아에 대해
헤라클레스 가(家)의 손안에 있던 리디아의 주권은

칸타울레스를 마지막으로 크로이소스 일문(메름나드 가)으로 옮겨진다.
칸타울레스가 그녀의 아내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그의 신하 중 기게스에게 그녀의 알몸을 볼 수 있게 한다.
(그 당시 리디아인은 알몸을 보이는 것을 치욕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기게스와 계략을 꾸미고 칸타울레스를 죽인다. 
기게스는 왕위를 찬탈하고 왕비와 결혼한다.

크로이소스는 여러 민족(그리스인)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데 이러는 도중 솔론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여기에서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보고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솔론이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자 아쉬워한다. (참고 1)
크로이소스에게 불행이 닥치는데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꿈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식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쟁터에도 못나가게 하고 위험한 장소, 행사 등에는 참석치 못하게 했다. 

하지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법 결국은 프리기아인 아드라스토스에 의해 왕자는 죽게 된다.

*메디아에 대해 (왕의 계보순서)
1. 데이오케스 - (여러부족의 재판관이었던 그는 그후 지역의 여러부족을 통합하고 왕위에 오른다)
2. 프라오르테스 - (페르시아를 속국으로 만듬)
3. 키악사레스
4. 아스티아게스 - 딸의 꿈을 꾼다 

(딸이 방뇨를 하여 전도시가 물에 잠기는 꿈, 

딸의 음부에서 포도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이것이 아시아 전역을 뒤덮는 꿈)

* 키루스의 출생과 성장
- 아스티아게스는 해몽가로부터 그의 꿈에 대한 의미를 듣고 

딸을 캄비세스 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인 에게 시집을 보낸다. 그리고 딸이 자식을 낳으면 죽여 없애려 한다. 

딸이 아이를 낳자 자신이 가장 신임이 가는 하르파고스를 불러 그 아이를 죽이라 명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이를 하지 못하고 대신 소치기 에게 명한다. 

소치기도 이 말을 듣고 자신이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만 

마침 자신의 아내가 출산을 했는데 사생아를 낳게 되자 

그 아이를 자신의 사생아와 바꾸어 죽인 것처럼 꾸민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그 아이(키루스) 가 동네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왕 놀이를 하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애들을 호되게 때리게 되고 이것이 커지게 되어 왕에게 까지 불려가게 된다. 

왕은 그 아이의 신분에 맞지 않는 용맹함과 또 자신을 닮았다는 점에서 하르파고스를 불러 추궁한끝에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하르파고스 에게는 그 죄를 물어 자식을 저녁식사로 먹게 되는 끔찍한 일이 생기지만 

아이는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진짜 부모에게 돌아간다. 
키루스가 성장하고 총명 받는 인물이 되자 

하르파고스는 왕에 대한 복수심으로 키루스를 설득하여 반란을 준비한다. 

결국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와 키루스에 의해 왕위를 뺏기고 메디아의 역사도 여기서 끝난다. 
키루스는 그 후 상(上)아시아 정복을 해 나가게 되고 그중에 바빌론을 점령하게 된다.

*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강이 그 도시의 중앙을 지나게 되어있고 
또한 전의 왕들이 강지역을 개간하고 물길을 여러 곳으로 돌려서 국토를 풍요롭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전 아시아의 1/3에 해당하는 물자를 공급할 정도로 부유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발까지 닿는 긴 삼으로 만든 속옷을 입고 다시 모직 내의를 입는다. 

이곳에는 진기한 풍습이 있는데 

하나는 혼기에 찬 여자들을 경매에 부치는 것과, 

의사가 없기에 병자와 똑같은 병을 앓았던 전의 사람이 그를 치료하는 것이다.[참고 2]

* 페르시아의 풍습
우상을 비롯하여 신전이나 제단을 세우는 풍습이 없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자를 업신여긴다. 

또한 하늘 전체를 제우스라 부르고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갖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술을 먹고도 실례를 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자기 자신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을 제일 존중한다. 

다음은 두 번째로 가까운 민족, 이런 식으로 자국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평가를 내린다. 

가장 치욕적인 것을 거짓말하는 것으로 한다. 또한 하천을 깊이 숭배하여 침을 뱉거나 손을 씻지 않는다.

한편 페르시아의 국세가 날로 증가함에 따라 크로이소스왕은 슬픔에만 잠겨있지 못하고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신탁소로 사자들을 보낸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좋은 신탁이라 생각한 크로이소스왕은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전쟁을 준비한다.
크로이소스는 (신탁의 진의(眞意)를 잘못 알고) 키루스 왕과 페르시아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진격을 한다. 

그들은 프테리아 지역에서 대치한다. 둘은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데 

크로이소스(자신의 군사력이 약하여 전쟁에서 이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지원요청을 하고 

겨울이 끝나는 봄에 다시 전쟁을 하기 위해)는 사르데스로 귀한을 한다. 

그러나 키루스는 이를 알아채고 지원요청과 병력집결이 되기 전에 사르데스를 포위하고 크로이소스를 잡는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총명함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키루스 왕의 곁에서 도움을 준다

 

2권 이집트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룬다.

제1장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즉위와 이집트 원정 착수 
제2~4장 프삼메티코스 왕의 실험과 이집트인들의 업적 
제5~34장 이집트의 지리
제5~18장 이집트의 지형과 크기 
제19~27장 나일 강의 홍수 원인 
제28~34장 나일 강의 원천 
제35~98장 이집트의 관습과 문화 
제35~36장 이집트와 다른 지역의 관습 차이 
제37~48장 이집트인의 종교적 관습 
제49~58장 이집트 신앙과 제식의 그리스 전래 
제59~64장 이집트의 제전들 
제65~76장 이집트의 동물과 동물숭배 
제77~91장 이집트 경작 지대의 관습 
제92~98장 이집트 늪지대의 관습과 문화 
제99~182장 이집트의 역사 
제99~141장 이집트의 왕들: 민, 세소스트리스, 케옵스, 미케리노스, 세토스 등 
제142~46장 이집트의 연대 추산 
제147~82장 이집트의 왕들: 프삼메티코스, 네코스, 아프리에스, 아마시스 등

 

내륙은 여러 개의 강이 흘러 물이 풍부하고 평판하며 

토양은 진흙과 나일강이 에티오피아에서 운반해온 충적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검고 무르다. 

국토를 플란티네 만(灣)에서 카시오스 산을 끼고 있는 세르보니스 호(湖)까지로 한정한다. 

이집트인은 이 나라 특유의 풍토와 독특한 하천과 성격을 달리하는 강 때문인지, 

거의 모든 점에서 다른 민족과 정반대되는 풍속과 습관을 갖고 있다. 

예컨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바뀌어 여자가 장사를 하고 남자는 집에서 옷감을 짠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집트에서는 오리라 라는 곡식을 식량으로 저장한다. 

또한 세계 어떤 민족보다도 신앙심이 깊은 민족이고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해서 

돼지를 건드리게 되면 곧 옷을 입은 채로 강에 뛰어 들어가 몸을 씻는다. 

돼지를 기르는 사람은 제일 하천한 사람이다. 

이집트에 서식하는 동물은 가축으로 키워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만 모두 신성시되고 있다. 

(고양이, 악어, 하마, 수달, 피닉스라는 성조, 뱀 등) 
이집트인은 조상 전래의 풍습만 준수하고 결코 새로운 다른 풍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점복술은 절대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고 믿어지고 있고 몇몇 신만이 이를 행한다. 

이집트에서의 의술은 각각의 의사는 한 종류의 병만을 취급한다. 

미이라를 만들어 시신을 보관한다.[참고 3]

* 이집트의 최초5대왕
민 - 나일강물을 돌려 산간 평야지대로 흐르게 했다. 
그리고 간척사업을 통해 도시(멤피스)를 건설했고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건립했다.

세소스트리스 - 대륙을 석권하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스키타인 및 트리키아인을 정복하기에 이름, 

유일하게 에티오피아를 통치한 이집트 왕

페로스 - 어렸을적 장님이 되지만 다시 눈을 뜨게 된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에 두개의 석조 오벨리스크를 봉납함

프로테우스 람프시니토스 - 막대한 양의 은을 소장
그 뒤의 이집트의 왕들은 국민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쿠푸 왕과 그의 동생 카프라가 왕위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106년) 신전을 폐쇄하고 

자신을 위해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전 국민을 동원했다. 

석재를 끌고 가기 위한 도로를 건설하는데 실로 10년에 걸쳐 국민의 고역이 계속됐고 

피라미드 자체의 건조에는 20년, 

또한 피라미도가 설 언덕의 중턱을 깎아 지하실을 만드는데 10년이 소요됐다. 

키프라의 아들 미케리노스가 왕이 된 후 그는 신전을 개방하고 

각자 자유스럽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종교적인 관습을 행하도록 하였으며 

역대 제왕 중에서 가장 공정한 재판을 행했지만 두 가지의 재난이 닥쳐왔다. 

하나는 외동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그것은 이미 신에 의해서 150년에 걸쳐서 이집트가 참혹한 고난을 맛보도록 정해져있었다는 것이다.

 

3권 - 페르시아의 원정계획과 내분

제1~38장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제1~3장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이유
제4~16장 이집트 정복과 캄비세스의 만행
제17~26장 페르시아의 에티오피아와 암몬 원정 실패
제27~38장 캄비세스의 광적인 행동
제39~60장 스파르타의 사모스 공격 
제39~43장 폴리크라테스의 번성
제44~53장 사모스 공격의 배경
제54~59장 사모스 공격과 철군
제60장 사모스의 건설 업적 
제61~87장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의 즉위 
제61~67장 마고스의 반란과 캄비세스의 사망 
제68~79장 7인의 거사 
제80~82장 정치체제 논의 
제83~87장 다레이오스의 즉위 
제88~117장 다레이오스의 통치 영역 
제88~97장 20개 통치관구 제정 
제98~105장 인도인들의 관습과 문화 
제106~17장 세계 변방들의 자연 환경과 산물 
제118~60장 다레이오스의 지배 384 
제118~28장 인타프레네스와 폴리크라테스, 오로이테스의 죽음 
제129~38장 크로톤의 명의 데모케데스 
제139~49장 페르시아의 사모스 정복 
제150~60장 바빌론의 반란과 페르시아의 재정복 

 

* 인물소개
아마시스 - 사이스주 출신으로 평민 집안이지만 모멤피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집트의 왕이 된다. 

왕의 품위에 맞지 않는 행동을 많이 하며 진지하게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또한 그리스인에게 자주 호의를 표하였다.

캄비세스 - 키루스의 아들로서 포악하고, 다혈질이다.

다레이오스 - 캄비세스가 죽은 후 페르시아의 정권을 다시 구하기 위해 뭉친 

7인의 페르시아인중의 한 사람으로 독재제를 주장했고 

후에 얄팍한 수를 써서 7인의 페르시아 인중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

마가바조스 - 다레이오스와 함께 페르시아를 다시 구한 멤버중의 한 사람. 

과두정치를 주장했고 후에 다레이오스를 옆에서 보좌함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에 사자를 보내 아마시스에게 딸 한명을 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에 아마시스는 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보낸다. 

이를 알게 된 캄비세스는 격노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서게 된다.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에 나서는 동안 

아마시스는 죽고 그의 아들 프사메니토스가 통치하게 되지만 캄비세스에게 패한다. 

(페르시아인은 왕가의 후예를 존중하는 기풍이 있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드는 경우에도 

그 자손에게는 언제나 주권을 돌려주었다.) 
캄비세스는 이집트 공략 후 에티오피아 및 암몬인 정벌계획을 세우고 

에티오피아로 친교를 위장한 첩자를 보내지만 

이는 곧 들통이 나고 에티오피아 왕은 캄비세스에게 충고의 말을 보낸다. 

캄비세스는 흥분을 못 이겨 병력을 이끌고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러 가지만 

흥분한 나머지 소흘한 전쟁준비와 식량부족으로 결국은 멤피스로 퇴각한다.

* 캄비세스의 악행 
- 스메르디스(친동생) 살해 - 꿈속에서 스메르디스가 자기대신 옥좌에 있는 모습을 보고
- 친누이이자 아내를 살해

한편 캄비세스가 이집트에 머물고 있을 때 마고스 계급의 형제에 의해 모반이 일어난다. 

그 중 한명은 스메르디스(살해당한 캄비세스의 동생)와 빼닮았고 이를 이용한다. 

캄비세스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행동(동생을 살해한) 에 대해 죄를 깨닫고 지체 없이 마고스를 토벌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칼에 의해 허벅지를 찔리게 되고 신탁이 내려진 바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캄비세스는 자신의 왕가 유지를 위해 스메르디스에 대한 사실을 신하들에게 말하고 

지금 모반을 일으킨 형제를 처벌하기를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다레이오스를 포함한 7인의 페르시아인들은 사실을 확인하고 마고스를 처벌한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정치방법에 대해 논의를 한다.

[각각의 주장]
오타네스는 페르시아인 전체에게 국정의 처리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캄비세스의 폭정을 예로 들면서 대중에 의한 정치는 

첫째로 만민 평등이라는 참으로 훌륭한 명분을 갖고 있고 

둘째로 이 체제하에서는 독재 체제하에서 일어나는 일이 행해지지 않고 

관리들은 추첨에 의해 선출되고 책임감을 갖고 직무를 수행하며 

모든 국가 정책은 여론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메가바조스는 국정은 소수자의 통치(과두정치) 에 맡겨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중중에는 쓸모없고 무식하고 무책임한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게까지 그런 권한을 준다면 오히려 더 혼란을 준다고 한다. 
다레이오스는 독재제를 주장한다. 

가장 뛰어난 한 사람에 의한 통치 체제보다 더 훌륭한 체제가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인물이라면 탁월한 식견을 발휘해 민중을 훌륭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7인은 다레이오스의 의견을 따르게 되고 다레이오스는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자 세금의 원활한 납부를 위해 행정구를 제정한다. 

20개의 징세구를 통해서 1년에 약 1만4560탈란톤의 은이 세금으로 거둬들이게 되고 

자신의 업적 중 최초인 사모스섬을 점령하게 된다. 

그사이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지만 이것도 조피로스에 의해 진압이 되어 평온한 상태로 돌아간다.

4권
제1~82장 스키티아인들이 관습과 문화 
제1~4장 다레이오스의 스키티아 원정 배경 
제5~16장 스키티아인들의 유래 
제17~20장 스키티아인 종족들 
제21~35장 스키티아 너머의 종족들 
제36~45장 세계의 지리: 리비아, 아시아, 에우로파 
제46장 스키티아인들의 유목 생활 
제47~58장 스키티아의 강들 
제59~75장 스키티아인들의 관습: 제사, 전쟁, 예언술, 장례 
제76~80장 스키티아인들의 외국 관습 배격 
제81~82장 스키티아인들의 인구수 
제83~144장 다레이오스의 스키티아 원정 
제83~98장 원정군의 진로와 이스트로스 강 도강 
제99~101장 스키티아의 지형 
제102~20장 스키티아 주변 종족들과 그들의 관습 
제121~29장 스키티아인들의 후퇴와 페르시아군의 추격 
제130~44장 페르시아군의 곤경과 퇴각 
제145~205장 페르시아의 리비아 원정
제145~67장 테라와 키레네의 건국과 역사 
제168~80장 트리토니스 호수 동쪽 해안의 리비아인 종족들과 그들의 관습 
제181~85장 내륙의 리비아인 종족들과 그들의 관습 
제186~90장 트리토니스 호수 동쪽의 리비아인들의 유목민 관습 
제191~96장 트리토니스 호수 서쪽의 리비아인 종족들과 그들의 관습 
제197~99장 리비아의 지리와 생산 
제200~05장 페르시아군의 리비아 원정

- 스키타이, 다레이오스의 활약
다레이오스는 그가 지배하는 아시아지역의 인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국고 수입도 막대해지자 예전에 메디아를 침략했던 스키타이인 원정에 나선다.
다레이오스는 사방의 각 속국에 사절을 보내 보병부대와 함선의 공출을 명하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군대를 이끌고 수사를 출발하여 이스트로스 강에 도달한다. 

다레이오스는 여기에서 다리를 건설한 후 

이오니아의 지휘관들에게 다리를 경비하도록 남겨두고 진군한다.[참고 5]
한편 스키타이는 다레이오스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주변의 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왕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을 비추게 된다. 

스키타이 군은 위와 같은 회답을 받고 여러 민족이 동맹군에 가담하지 않는 이상 

정면에서 맞서 싸우는 것은 피하고 두 부대로 나누어 차례로 철수해 가면서 지나갈 때마다 

우물과 샘을 파괴해 묻어버리고 풀은 짓밟아 버리기로 결정한다. 

또한 퇴각하면서 주변나라로 들어가 그들의 전쟁 참여를 유발하고 

페르시아군(다레이오스군)의 식량 공급로를 차단한다. 

이로 인해서 다레이오스군은 식량난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퇴각을 결심한다. 

그리고 메가바조스를 총사령관으로 유럽에 남겨두고 페르시아로 돌아온다.

* 스키타이에 관해
- 가장 역사가 짧은 민족이며 역대왕은 헤라클레스의 막내아들인 스키테스의 후예들이다.
말위에서 활과 화살을 갖고 전투를 벌이고 생활은 농경이 아니라 가축에 의존했다. 

국토는 목초와 물이 풍부한 평원으로 많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신을 숭배하고 목재가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뼈, 가죽 등으로 불을 만들었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외국풍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무척 꺼렸다.

 

5권

제1~27장 페르시아의 트리키아, 마케도니아 원정 
제1~2장 메가바조스의 페린토스, 트라키아 정복
제3~8장 트라키아인 종족들과 그들의 관습
제9~10장 이스트로스 강 너머의 종족과 관습
제11~16장 메가바조스의 파이오니아 정복
제17~22장 페르시아 사절들의 마케도니아 방문과 피살
제23~24장 히스티아이오스의 수사행(行)
제25~27장 오타네스의 비잔티온, 렘노스 점령
제28~37장 이오니아 반란 발생 
제28~34장 밀레토스와 페르시아 연합군의 낙소스 원정 실패
제35~37장 이오니아의 반란 개시
제38~54장 아리스타고레스의 스파르타 방문과 스파르타의 지원 거절 
제38~48장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와 도리에우스
제49~51장 클레오메네스의 지원 거절
제52~54장 ‘왕의 길’의 경로와 역참들
제55~97장 아리스타고레스의 아테네 방문과 아테네의 지원 수락 
제55~56장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의 피살
제57~61장 페니키아 문자의 그리스 유입
제62~65장 아테네의 참주정 붕괴와 히피아스 출국
제66~69장 클레이스테네스의 부족제 개편
제70~89장 아테네의 대외적 분쟁들
제90~96장 히피아스의 아테네 복귀 좌절
제97장 아테네의 지원 수락
제98~126장 이오니아 군대의 공세와 키프로스 반란
제98장 파이오니아인의 귀향
제99~103장 이오니아 군대의 사르디스 공격
제104~15장 키프로스의 반란과 좌절
제116~23장 페르시아군의 반란 지역 진압: 헬레스폰토스, 카리아, 아이올리스, 이오니아 일부
제124~26장 아리스타고레스의 도피와 사망


- 인물 소개
아리스타고라스 - 히스타이오스의 조카로써 야망이 크고 비겁하며 

다레이오스의 도움을 받아 밀레토스를 독재하게 되지만 

결국은 무능함이 드러나고 도시도 빼앗기게 되며 비참하게 죽는다. 

히스타이오스 - 그리스인, 주위로부터 신뢰가 두텁고 총명하고 능력있는 관리, 

나중에는 다레이오스의 자문역을 맡게 된다.

메가바조스는 파이오니아족을 인솔하여 사르데스에 도착 후 

다시 원정대를 이끌고 밀레토스를 향해 돌진한다.
밀레토스의 독재자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위협에 직면하자 

스파르타왕 클레오메네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을 당하고 아테네로 길을 돌린다. 
아테네에 도착하여 그는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아테네인에게 요청하는데 

결국 설득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밀레토스로 돌아온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 족을 구슬려 자기편에 놓고 

아테네를 포함한 여러 동맹국들과 사르데스로 진격을 하고 손쉽게 사르데스를 손에 넣는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한 병사가 어느 집에 불을 지르고 

이 불은 삽시간에 사르데스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신전까지 죄다 없애버리게 된다. 

이 소식을 알고 페르시아 군이 급히 달려오지만 이미 사르데스는 잿더미만 남아있게 된다. 

페르시아인들은 분노하게 된다.

* 아테네의 독재제에서 벗어나는 과정
- 알크메온 일족은 당시 델포이에 체제하면서 무녀를 매수하여 

스파르타인이 개인적인 용무나 혹은 공적인 용무로 신탁을 구하러 올 경우에는 

아테네를 해방시키는 것을 그들의 의무라고 신탁을 내리게 했고 

이에 따라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요시한 스파르타인은 

아테네를 독재하고 있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을 추방하려 했다. 

첫 원정에서는 패배를 하지만 

클레오메네스왕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다시 아테네 원정을 나가게 되고 그 일족을 아테네에서 떠나게 한다. 

이로써 아테네는 독재자의 전제(專制)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미 강대국이었지만 독재자로부터 해방이 되자 한층 더 강대해졌다. 

그 후 아테네인들은 클레오메네스왕의 스파르타군을 추방시킨다. [참고 6]
아테네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단지 한 가지 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실증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독재 하에 있었을 때는 전력 면에서 어떤 나라도 능가하지 못했었지만 

일단 독재자로부터 해방되고부터는 다른 모든 나라를 누르고 최강국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히 그들이 압제 하에 있었을 때는 

마치 노예가 그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을 꺼리듯이 독재자를 위해 일하는 것을 고의로 기피했었지만, 

자유의 몸이 되고부터는 각자 자신의 이해에 관심을 갖고 일할 의욕을 불태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6권

제1~42장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반란 진압 
제1~5장 히스티아이오스가 반란 가담
제6~18장 이오니아인들의 라데 전투 패배와 밀레토스 함락
제19~30장 밀레토스 함락의 여파와 히스티아니오스의 죽음
제31~33장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재정복 및 헬레스폰토스 서부 지역 점령
제34~42장 밀티아데스 일가의 케르소네노스 통치
제43~45장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원정과 중도 퇴각 
제46~120장 다레이오스 치세의 그리스 원정 
제46~47장 다레이오스의 타소스 제압
제48~49장 다레이오스가 그리스 국가들에 항복 요구. 아이기나인의 항복
제50~73장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의 아이기나 응징
제74~84장 클레오메네스의 행적과 죽음
제85~93장 아테네와 아이기나의 분쟁
제94~101장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원정과 에레트리아 점령
제102~17장 마라톤 전투와 그리스군의 승리
제118~20장 페르시아군의 퇴각과 스파르타군의 뒤늦은 도착
제121~31장 알크메오니다이 가문
제132~40장 밀티아데스의 행적: 파로스 원정과 렘노스 점령 


- 인물 소개
데마라토스 - 클레오메네스 1세와 함께 스파르타를 다스렸다.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네와 아이기나에서 꾀한 음모를 좌절시켰으나, 

클레오메네스의 책략(策略)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페르시아의 다리이오스에게로 도망갔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입에 수행하여 조언을 하였다. 

아리스톤(스파르타의 왕)의 아들, 칠삭둥이

클레오메데스 - 스파르타 왕조 가문, 

권력에 눈이 멀어서 아테네인에게 매수되어 죄없는 아이기나인들을 억압, 

데마라토스를 모함하여 왕좌에서 내쫒음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반란을 일으켜 사르데스를 함락했었지만 

곧 페르시아 군대에 패하여 밀레토스로 퇴각하고 여기서 그의 무능함이 명백해져서 최후를 맞이한다. 

또한 밀레토스의 독재자 히스타아이오스

(원조 독재자였지만 다레이오스 왕의 수사로 다니게 되면서 아리스타고라스에게 그 자리를 주었던 것이다) 

다레이오스의 전쟁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미틸레네 라는 섬으로가 레보스인을 설득하고 

배를 얻어 흑해에서 나오는 배를 닥치는 대로 모두 포획했다. 
한편 페르시아군이 밀레토스를 비롯한 이오니아 각지로 진격한다는 소식은 들은 이오니아인들은 

집결하여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지만 전력규모에서 월등한 차이를 나타내며 패하게 되고 

마침내 아리스타고라스가 반란을 일으킨 지 6년째 되던 해 밀레토스를 마침내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겨울을 밀레토스 부근에서 나고 이듬해 출항하여 

키오스 레스보스 테네도스등을 쉽사리 정복하고 이러던 중 히스타아이오스를 잡아 책형에 처한다.
하지만 페르시아도 이오니아를 정복한 후 헬레스폰토스로 향하지만 

아토스반도에서 300척의 함선파괴와 브리고이인의 야습으로 많은 페르시아인을 잃고 아시아로 귀환을 한다.

* 스파르타
일찍이 스파르타왕 이었던 아리스톤은 두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게 되고 계략을 꾸며 친구의 아내를 얻게 된다. 

그리고 10개월도 되기 전에 데마라토스 라는 아이를 얻는다. 

아리스톤이 죽고 데마라토스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의 출생에 관한 비밀이 드러나고 

또한 클레오메네스와 불화가 생겨나서 클레오메네스와  레오티키데스, 무녀의 꿰임으로 탄핵된다. 

그 후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를 떠나 페르시아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참고 7]
그 후 클레오메네스와 레오티키데스는 

그들이 데마라토스를 모함했다는 음모가 알려지자 테살리오로 도주했다. 

그리고 스파르타를 공격하기 위해 아르카디아인을 선동, 규합하려 했다. 

하지만 클레오메네스는 정신이 돌아 자기 자신을 찢으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클레오메네스의 죽음을 접한 아이기나측은 레오티키데스의 죄를 규탄하기위해 스파르타에 사절을 파견하고 

또한 레오티키데스와 아테네로 가서 감금되어 있는 아이기나인들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지만 

아테네측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테네와 아이기나인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이 틈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왕은 자신의 계획(아테네 원정)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원정에 실패했던 마르도니오스(아토스반도에서 배 300척을 잃은)를 해임하고 

새로이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고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향해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리고 각 도시들을 정복하면서 에이트리아를 함락시킨 후 아티카 지방으로 진격시켰다. 

이것을 알게 된 아테네인은 곧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마라톤 지역으로 부대를 출동시키고 

또한 스파르타인 및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마라톤지역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장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다시 한번 패배를 하게 되고 다시 아시아로 돌아간다.
말티아데스는 페르시아 전투에서 아테네를 이끌어 승리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전쟁 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른 인종을 침략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빈손으로 들어오게 된다.

 

7권

제1~4장 다레이오스의 그리스 원정 재개 준비와 죽음 
제5~19장 페르시아 왕 크세륵세스의 즉위와 그리스 원정 결정 
제20~131장 크세륵세스의 그리스 원정 
제20~25장 원정 준비와 아토스 운하 건설
제26~32장 크세륵세스 휘하 육군의 진군: 카파도키아에서 사르디스로 행군
제33~36장 헬레스폰토스에 부교 건설
제37~44장 크세륵세스 휘하 육군의 진군: 사르디스에서 아비도스로 행군
제45~56장 크세륵세스와 아르타바노스. 페르시아 육군의 헬레스폰토스 통과
제57~60장 페르시아 육해군의 도리스코스 도착. 전군의 인원 점검
제61~83장 페르시아 육군 보병의 구성과 규모
제84~88장 페르시아 육군 기병의 구성과 규모
제89~100장 페르시아 해군의 구성과 규모. 크세륵세스의 전군 사열
제101~04장 크세륵세스와 데마레토스
제105~27장 페르시아 육해군의 테르메 도착
제128~31장 크세륵세스의 피에리아 방문과 테살리아의 지형
제132~78장 그리스인들의 대응과 전쟁 준비 
제132~37장 크세륵세스의 항복 요구와 일부 그리스인들의 항복
제138~44장 아테네인들의 델포이 신탁 문의와 테미스토클레스의 신탁 해석. 테미스토클레스의 전함 건조
제145~71장 그리스인들의 협약 체결과 페르시아 정탐. 아르고스, 시라쿠사, 크레타의 동조 거부
제172~74장 테살리아인들의 페르시아군 가담
제175~78장 그리스군이 테르모필라이와 아르테미시온에 집결
제179~239장 페르시아군의 진격과 양군의 결전 
제179~83장 페르시아 해군의 남하
제184~87장 페르시아 육해군의 전체 규모: 추가 병력 포함
제188~95장 페르시아 해군의 난파와 아페타이 정박
제196~200장 페르시아 육군의 멜리스 도착
제201~33장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페르시아군의 승리
제234~38장 페르시아군의 작전 논의. 레오니데스 시신 훼손
제239장 데마레토스의 비밀 전갈

 

- 인물 소개
마르도니오스 - 크세르크세스의 고종사촌 동생, 왕측근에서 가장큰 영향력을 행사, 

크세르크세스를 설득하여 그리스원정을 하도록 함. 

아테네를 공격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자 

왕이 군의 지휘권을 그에게 맡기고 귀국한 후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장군 파우사니아스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크세르크세스 - 다레이오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원정을 이끈 왕.

마라톤 전투의 패배소식으로 이미 사르데스에 대한 침공 후 아테네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다레이오스왕은 

그리스로 진격해 가고자 하는 결의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이 당시 데마라토스가 수사에 올라와 있었고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크세르크세스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다레이오스가 죽은 후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에 의해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우선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 전역을 다레이오스 시대보다 더 한층 가혹한 조건으로 예종 시킨 다음 

아테네 원정에 착수한다. 

하지만 아르타바노스(아버지의 형제)는 그리스인의 용맹함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또한 만약의 실패가 되면 후에 닥치게 될 재난을 두려워하며 신중한 생각을 하라고 권고한다. [참고 8]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원정을 결의를 굳힌 후 군대와 식량을 4년에 걸쳐 모은다. 

이번 원정의 규모는 실로 과거에 행해졌던 다른 원정의 병력을 모두 더해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다. 

아시아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크세르크세스의 원정에 참여치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었고 

또한 대 하천을 제외하고는 이 대군의 식수로 충당된 결과 고갈되지 않은 하천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한 것이 과거 원정길에서 아토스 산을 회항하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던 것을 상기하여 

미리 그곳의 바다에 운하를 파고 직선으로 길을 뚫었다

(아토스 부근을 지날 때 들쑥날쑥한 지형과 해안으로 배가 많이 난파당했다). 

또한 식량보급과 분배,사전 답사 등 만반의  준비하고 원정길에 나선다. 

크세르크세스는 사르데스에 도착하자 먼저 그리스에 사절을 파견하여 땅과 물을 요구하고 

왕을 위해 식사 접대 준비도 갖추어 놓으라고 통고했다. 

앞선 다레이오스도 이렇게 했었는데 이 당시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은 요구를 거절했고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사절을 파견했던 셈이다. 

그리고 다시 아비도스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아비도스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헬레스폰토스의 다리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공사가 끝나 다리가 개통되자마자 폭풍이 불어와 막 완성된 다리가 모두 파괴되었다. 

(헬레스폰토스를 건너기 위해 배를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크세르크세스왕은 헬레스폰토스에 크게 노하여 가신들에게 

바다에 대해 300대의 채찍형을 가하고 족쇄 한 쌍을 바다 속으로 던져 놓으라고 명했다.[참고 9]
크세르크세스는 아비도스에 도착하자 전군을 열병하기로 결정했다.
페르시아군, 메디아인, 그리스, 기시아족, 박트리아인, 인도인, 이리오이인, 파르티아인, 

코라스미오인, 소그디아인, 간다라인 등 수십의 나라,

3천여척의 배, 70만에 이르는 육상부대가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로의 원정길을 지나면서 거쳐 가는 강들을 모두 말려버렸고 

각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그곳에서 식사와 향응에 사용되어진 돈이 400탈란톤에 달했다고 한다. [참고 10]

[페르시아 왕의 출정은 명목상으로는 아테네를 토벌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전 그리스의 정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그리스 인들은 페르시아의 기세에 굴복하려 했지만 아테네 만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아테네가 겁을 먹고 조국을 포기했다면, 

해상에서 페르시아 왕을 맞아 싸우는 그리스 함대가 없었다면 

육상에서의 정황도 모두 페르시아 왕의 지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아테네가 그리스의 구세주였다고 얘기해도 진실을 벗어난 말은 아닐 것이다.] 

- 헤로도토스의 생각 -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신탁을 보내 받아온다. 

신탁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 당시 지혜롭기로 유명한 테미스토클레스가 의미를 해석하며 함선을 만드는데 힘을 쏟으라고 한다. 

그래서 아테네는 싫든 좋든 해군국이 될 수밖에 없었고 바야흐로 그리스가 구원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인 국가들 가운데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애국심에 불탔던 국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맹약을 했다. 

가능한 한 그리스 민족을 단결시켜 행동할 태세를 갖추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대했던 것은 아테네와 아이기나 사이의 알력이었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 사자를 보내고 페르시아에 첩자를 보내어 타국의 형세를 파악하고 

안으로는 동맹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들이 그리스의 운명을 위해 전쟁에 임하게 됐다.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라이로 진군을 하게 된다. 

테르모필라이의 지형은 서쪽은 오르기 어려운 험준한 높은 산이 있으며 

또한 도로 동쪽은 바다와 인접해 있고 소택지 일색이다. 

그리고 도로는 진입로의 폭이 좁고 또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군은 여기에 진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기다렸고 

페르시아군도 이런 지형을 파악하고 쉽사리 이동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페르시아군의 해상과 육상부대의 규모를 파악해 본다면 

해상병력 52만, 함선 1207척, 보병부대 180만, 

여기에 유럽에서 징용된 부대병력을 더하고 

전투부대를 원조하는 원정군을 더하면 528만에 달했던 것으로 된다. 
여러 날에 걸친 테르모필라이의 전투는 지형의 조건의 유리함과 

또한 동맹국 스파르타인 들의 분전(적을 공략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등으로 

페르시아는 타격을 많이 받게 되고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말리스 지방의 에피알테스라는 자가 테르모필라이로 통하는 셋길을 알려주고 

결국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를 정복하지만 

스키타이의 용맹함과 그리스 함대의 막강함에 많은 손실을 보게 된다. 

여기서 크세르크세스는 스키타인의 전투력에 실로 놀라게 된다.

 

8권

제1~23장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양측의 손실 
제1~3장 그리스 해군의 전력과 지도권
제4~5장 그리스 해군의 아르테미시온 주둔
제6~14장 제1차 해전. 폭풍과 페르시아 해군의 손실
제15~18장 제2차 해전과 양측의 손실
제19~20장 에우보이아의 가축 피해
제21~23장 테르모필라이 패전 소식과 그리스 해군의 퇴각
제24~39장 페르시아군의 진격: 포키스와 보이오티아로 진군 
제24~26장 페르시아군의 상황
제27~30장 테살리아인과 포키스인의 불화
제31~33장 페르시아군의 포키스 진군
제34~39장 페르시아군의 보이오티아, 델포이 진군
제40~96장 살라미스 해전과 그리스군의 승리
제40~41장 아테네인들의 아티카 철수
제42~49장 살라미스의 그리스 해군 전력. 해전 장소 논의
제50~55장 페르시아군의 아테네 점령
제56~64장 그리스인들이 살라미스를 해전 장소로 결정
제65~69장 페르시아군이 해전을 치르기로 결정
제70~83장 그리스군의 재논의와 테미스토클레스의 행적
제84~96장 살라미스 해전
제97~120장 크세륵세스의 퇴각과 아시아로의 귀환 
제97~103장 크세륵세스의 퇴각 결정
제104~10장 페르시아 해군의 퇴각과 그리스군의 추격
제111~12장 그리스군의 안드로스 공격
제113~20장 크세륵세스의 퇴각
제121~44장 크세륵세스 퇴각 후 양측의 상황 
제121~25장 그리스인의 감사 제물과 논공행상
제126~29장 아르타바조스의 행적
제130~32장 양측 해군의 상황
제133~35장 마르도니오스의 신탁 문의
제136~44장 알렉산드로스의 아테네 회유와 아테네의 거부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를 정복하고 에우보이아에 머물러 해전(아르테미시온 해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밤새 폭우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고 천둥이 작렬하듯이 울려왔다. 

이전에도 이러한 사태로 공포를 느꼈던 페르시아인들은 여기서도 잔혹하게 희생되었고 

이것도 모두 페르시아의 훨씬 우세한 전력을 격하시켜 

그리스군과 똑같이 만들려 한 신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쨌든 페르시아는 계속 진군을 하고 

도리스 포키스전역을 거쳐 케피소스 강을 따라 전진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드리모스를 비롯한 카라드라, 에로코스, 암피가이아등의 도시들을 낱낱이 불태워 버렸다.

아르테미시온을 떠난 그리스 함대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뱃머리를 살라미스 섬으로 향하게 되고 

여기서 페르시아군을 기다리게 된다.(이 당시 그리스 함선은 378척) 

한편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를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크레르크세스가 아테네인이 이미 피란하여 무인지경이 된 아티카땅을 육상부대로 유린하고 있을 때 

먼지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데마라토스와 디카이오스가 보게 된다. 

또한 홀연의 목소리가 들려 왔는데 

디카이오스는 이 소리가 페르시아군대에 일대 재난을 가져올 것을 예상한다.
드디어 살라미스에서 해전은 시작되고 게다가 한 여자의 환영이 그리스군의 눈앞에 나타나 

먼저 그리스 전군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꾸짖으며 고무 격려했다고 한다.
이 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응하여 (특히 아이기나군과 아테네군) 

페르시아 함선을 항해 불능상태로 만들며 승리한다. 
크세르크세스왕은 패전을 깨닫고 자신이 처한 곤경을 페르시아에 알리며 퇴각을 준비한다.  

대신 마르도니오스가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 정벌을 꾀한다. 
마르도니오스는 페르시아인과 친분이 있는 알렉산드로스를 사절로 삼아 

아테네에 파견하여 아테네와 교섭을 하지만 

자유를 갈망하고 독재를 싫어하는 아테네인들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 이제 나로서는 신탁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신탁의 문구를 접하게 될 때는 실로 명백한 언어로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신탁을 

결코 불신하고 싶지 않다. ’ ] - 헤로도토스 생각 - [참고 11]

 

9권

제1~24장 마르도니오스 군대의 재진격과 그리스인의 대응 
제1~11장 페르시아군의 아테네 재점령과 스파르타군의 출정
제12~18장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서 테바이로 물러남
제19~24장 그리스군이 페르시아 기병 격퇴
제25~89장 플라타이아 전투 
제25~32장 그리스군의 플라타이아 진군.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전열 구성
제33~40장 양측의 희생제식과 소극적 태도
제41~45장 마르도니오스의 전투 결정과 알렉산드로스의 제보
제46~57장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과 그리스군의 진지 이동
제58~75장 플라타이아 전투와 그리스군의 승리
제76~85장 전투 후 그리스인들의 상황과 전리품 분배
제86~89장 그리스인들의 테바이 응징과 아르타바조스의 퇴각
제90~107장 미칼레 전투
제90~101장 그리스군의 이오니아행(行) 항해와 미칼레 상륙
제102~05장 미칼레 전투와 그리스군의 승리
제106~07장 전투 후 양측의 상황
제108~13장 크세륵세스의 연애 행각과 마시스테스의 반란
제114~22장 그리스군의 세스토스 점령과 아르타익테스의 죽음 

 

- 인물 소개
알렉산드로스 - 마케도니아의 왕가의 아들, 아테네인을 위해 많은 선행을 베품, 

후에 마르도니오스와 함께 아테네와 교섭을 하려 하지만 실패함

마르도니오스는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아테네측의 회답을 듣자 곧 전속력으로 테살리아에서 발진하여 

아테네를 목표로 군대를 전진시키고 그가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서 병력을 징발했다. 

그리고 제차 아티카를 점령하지만 그가 점령한 것은 인적 없는 시가뿐이었다. 

마르도니오스는 무리키데스라는 자에게 

아테네에 도착하자 다시금 전에 알렉산드로가 전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가지고 살라미스로 가도록 했다. 

아테네의 감독관들은 회담을 하루하루 연기하며 대답을 미루면서 스파르타 지원 병력을 기다린다. 

아테네가 이번에도 교섭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마르도니오스는 퇴각을 하고 

양국은 에리트라이의 지역에 이르러 대치하게 된다. 

스파르타군이 지협에 도착하고 

펠로폰네소스 제국도 수수방관만 하던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알고 

아테네와 연합을 하고 한동안 전투를 하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군의 유명한 장수를 죽이게 되자 사기가 올라가 플라타이아로 진격을 결의한다.

페르시아군 11만 vs 그리스군 3만9천 이것이 플라타이아에서 양국의 군사규모였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적은 군사였지만 훌륭히 싸웠고 페르시아군사 또한 잘 싸웠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 군대는 퇴각하고 이 싸움은 위와 같이 끝났다. 

델로스 섬에 정박한 그리스 연합해군은, 

페르시아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모스인(人)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범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은 미칼레 곶으로 후퇴하여, 병선을 육지에 올려놓고 육군과 합세, 6만 병선으로 진을 쳤다. 

이를 추격한 6,000병력의 그리스 해군은 적전상륙(敵前上陸)을 감행, 협공하였다. 

여기에 사모스인 ·밀레토스인 등 페르시아 지배하의 이오니아인이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군은 패배한다. 

그리스군은 이 기세를 몰아 세스토스까지 포위를 하며 더 진군을 하려 했지만 

포위기간이 길어지고 사기도 저하되어 결국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참고 자료]
1. 솔론이 크로이소스왕에게 한 말
‘ 크로이소스왕이시여, 왕께서는 제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묻고 계십니다만, 

저는 신이 인간의 번영을 질투하고 인간을 괴롭히길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가노라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라도 보아야 하고 겪고 싶지 않은 것일지라도 겪어야 합니다. 

왕께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계시고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왕께서 물으신 것에 대해서는, 

왕께서는 훌륭하게 생애를 마치셨다는 걸 알 때까지는 저로서는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유한 자일지라도 끝까지 훌륭하게 일생을 마칠 수 있는 행운을 갖지 않는 한, 

결코 그날그날 벌어먹고 지내는 자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아돌 정도로 돈이 많다 하더라도 불행한 자가 많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더라도 행운을 누리는 자 또한 많이 있습니다. 
부자는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재난을 견뎌 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유리합니다. 

그러나 행운이 있는 자에게는 다른쪽에 없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재난을 견뎌 낼 수 있는 점에서는 부자만 못합니다. 

그러나 행운이 따르면 그러한 것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곤경에 빠지지 않고 건전한 육체와 건강, 훌륭한 자식과 아름다운 용모를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바로 왕께서 찾고 계신 인물 즉 행복한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2. 바빌론 풍습
가장 아름다운 여자부터 시작하는데 그 여자가 팔리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자를 불러 올린다. 

여자들은 결혼을 위해 경매에 부쳐지는 것이다. 

부유한 청년들은 서로 값을 올려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사려고 하고 

반대로 서민 계층은 얼굴이 아름다운 것 따위는 따지지 않고 돈을 받고 

오히려 못난 여자를 손에 넣는 것이 통례였다. 

경매인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대충 팔고 난후 

이번에는 제일 못난 여자 혹은 불구인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를 경매에 부친다. 

여기서는 가장 돈을 적게 받고 이 여자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떨어진다. 

요컨대 얼굴이 예쁜 여자가 못생긴 여자나 불구자에게 지참금을 주어 시집보내는 셈이다.

3. 미이라 만드는 법
가장 비싼법은 오장육부를 모두 꺼낸 후 

이것들을 야자유로 깨끗이 씻고 또 갈아서 으깬 향료로 다시 씻는다. 

이어서 순수한 몰약과 계피 및 유향을 제외한 향료로 복강을 가득 채우고 봉합한다. 

그런 다음 이것을 천연소다에 담그고 70일간 놓아둔다. 

70일이 지나면 질 좋은 아마포를 잘라 만든 붕대로 전신을 감싸고 그 위에 고무를 바른다.
중급정도의 법은 삼을 뽑아 낸 기름을 주입기에 가득 넣고 유체의 복부에 주입한다. 

복부를 절개도 하지 않고 오장육부도 꺼내지도 않는다. 

항문으로 기름을 주입하고 역류하지 않도록 막은 후 

소정의 일수만큼 천연소다에 담그어 70일째가 되면 앞서 주입한 삼목유를 복부에서 빼낸다. 
가장 재력없는 자들이 사용하는 법은 하제(下劑) 사용하여 내장 속을 세척한후 

70일간 천연소다에 담그는 것이다.

4. 페로스의 장님 탈출기
10년간 장님 상태로 지내다가 11년째 신탁을 받아 남편밖에 접한 일이 없고 

외간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오줌으로 눈을 씻으면 다시 눈이 밝아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제일먼저 왕비를 시험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많은 여성들을 시험한 눈을 뜨게 된다. 

그는 이때까지 시험했던 여자들 중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여자를 제외한 모든 여자를 적토라 불리는 도시에 집결시켜 불태워 죽였다 한다.

5. 이오니아의 다리 경비
다레이오스는 곧 이오니아의 지휘관들을 소집하고 60개의 매듭으로 묶은 긴 혁대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오니아 여러분, 앞서 다리에 대해 내렸던 내 명령은 취소하오. 

그 대신 이 혁대를 줄 테니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 하도록 하시오. 

그대들은 내가 스키타이인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면 그때부터 시작해서 매일 하나씩 매듭을 풀도록 하시오. 

그 기간 내에 내가 돌아오지 않고 매듭의 수만큼 날이 지나면 귀국해도 좋소. 

대신 그때까지는 다리의 보전과 경비에 전력을 쏟아주시오. 그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 될 테니까 말이오.”

6. 클레오메네스
클레오메네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자 언덕을 올라왔을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그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와 신에게 참배하고자 아테네 신전으로 막 들어가고 있을때 

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무녀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외쳤다.

 “스파르타에서 오신 분이여 돌아가시오 성소 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이곳은 도리스인은 들어올수 없는 곳이요.”  

하지만 클레오메네스는 무시하고 계획을 감행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다.

7. 데마라토스
아들아 지금까지 네가 알고 싶어하던 것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따라서 너는 저 영웅 아스트라바코스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리스톤의 아들이다. 

나는 그날 밤에 너를 수태했기 때문이다.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리스톤 자신이 10개월이 되지 않았으므로 

자기자식이 아니라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하여 

너의 적들이 이것을 너를 공격하는 제일 좋은 무기로 삼고 있지만 

그건 아리스톤이 이같은 일에 대해 잘 모르고 그런 말을 엉겁결에 입 밖에 냈기 때문이다. 

여자란 10개월이 되어야 꼭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란다. 

9개월째에 낳을수도 있고 7개월째에 낳을수도 있단다. 

아들아 나는 너를 7개월째에 낳았단다 

아리스톤 자신도 곧 자신이 모르고 그러한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8. 크세르크세스가 꾼 꿈
크세르크세스가 아르타바노스의 말에 화를 낸 그날밤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그리스 원정을 중지하지 말라는 계시를 내린다. 

하지만 크세르는 그 말을 무시하고 전날 아르타바노스의 말을 생각하며 

성숙치 않은 자신의 분별력을 알고 원정을 포기하려 한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꿈속에 그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 다시 한번 강조를 하며 

그리스 원정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자 

크세르왕은 공포에 짓눌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다음 사자를 보내 아르타바노스를 불러온다. 

그리고 꿈속의 일을 말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다가 

아르타바노스가 왕의 옷을 입고 옥좌에서 잠을 청하도록 한다. 

그날 밤에도 환영은 나타나 아르타바노스에게 

그리스 원정을 중지하지 않도록 크세르왕에게 고하라고 한다.

9.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전하 제가 꾼 꿈이 저나 전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밤 이래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특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있는 두 가지가 전하께 적의를 품고 있음을 깨닫고 

제 마음을 주체치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껴 왔습니다. 

그 두가지란 바로 육지와 바다를 가리킵니다. 

제가 아는 한 폭풍이 불 경우 우리의 이 함대를 수용하여 안전하게 지켜줄 만큼 큰 항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음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지가 전하께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즉 설사 전하의 진군을 저지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계속해서 진군하시면 하실수록 

육지 자체는 전하께 점점 더 적의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맞서는 자가 없다 하더라도 나날이 증대해 가는 거리 때문에 

반드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거라는 이야깁니다.

10. 원정군에 지출한 금액
즉 이미 오래전부터 향응 준비를 하라고 예고되어 있었고 또한 이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접대를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크세르크세스가 통과하게 된다는 소식을 왕의 전령으로부터 듣게 되자, 

도시 안에 있는 곡물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분배하고 수개월에 걸쳐 보리와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또한 군대를 맞기 위해 가능한 한 품질 좋은 가축을 사들여 사육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가금과 물새들을 우리와 연못에서 길렀으며 

금은제 술잔과 혼주발, 그 밖에 식탁용 집기 일체를 준비했던 것이다. 
군대가 도착하면 휴식을 취할 야영천막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식사때가 되면 진자 고통이 시작된다. 

그러나 접대받는 쪽은 실컷 먹고 그 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천막을 거두고 가져갈 수 있는 집기는 모두 가져가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깨끗이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실정에 대하여 아브데라인 메가크레온이 실로 적절한 말을 했다. 

즉 그는 아브데라의 시민들에게 남녀 모두 신전으로 가서 

곧 닥치게 될 재난을 반만이라도 면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원하고 

방금 지나가 버린 재난에 대해서는 크세르크세스가 저녁을 하루에 두 번 먹는 습관이 없었음을 

신들에게 깊이 감사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만약 저녁뿐만 아니라 아침까지 준비하라고 했다면 모두 그곳을 도망치던지 

아니면 비용 때문에 완전히 파멸하던지 했을 것이다. 

11. 신탁
‘그렇지만 그들이 광기어린 욕심에 휘말려 빛나는 아테네를 파괴하고 

바다에 면한 키노수라 에서 황금칼을 치신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해변 까지를 배로 이을 때
고귀하신 정의의 여신(데이케)께서 교만(히브리스)의 아들 포만(코로스) 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삼키게 하여 그 광폭함을 진정시키시리라.
청동과 청동과 서로 맞부딪치고 군신(아레스)께서는 피로 바다를 물들이실 것이다.
그리고 만기를 어람 하시는 크로노스의 아드님과 고귀하신 승리의 여신(니케)께서는 

헬라스의 나라에 자유의 달을 가져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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