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 (무쓰 무네미쓰,나카츠카 아키라, 2021)

시나리오/역사|2022. 8. 17. 09:00

책소개
『건건록蹇蹇錄』은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가 동학농민운동의 발발부터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 일청강화조약까지의 외교사안을 서술한 책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성의 공문기록을 기초로 하면서도 공식 문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진의를 드러내어 외교의 진면목을 다시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으나 일본과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했다. 새로운 번역과 청일전쟁연구의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를 통해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최종목적과 청일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목차
서언
제1장 동학당의 난
동학당의 난 ■ 조선국 파병의 내각 회의 결정 ■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권력다툼 ■ 위안스카이袁世凱, 왕봉조汪鳳藻 등의 오판 ■ 조선 국왕, 청국에 원병을 청함

제2장 일청 양국 군대의 조선 파견
톈진조약 ■ 청국 정부가 조선국에 파병함을 우리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청국 정부의 공문에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에 대한 제국 정부의 항의 ■ 제국 정부가 청국 정부에 대해 조선국에 파병한다는 공문 통보

제3장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및 취임 후 조선의 형세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 오토리 공사, 해병을 인솔하여 경성에 들어가다 ■ 조선에서의 구미 각국 관민官民의 정황

제4장 조선국 내정 개혁을 위한 일청 양국 공동위원 파견 제안
일청 양국 공동위원의 조선 파견에 관한 각의 ■ 일청 양국 공동위원회의 조선국 파견에 대해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를 거쳐 동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일청 공동위원설립 제안에 대한 청국 정부로부터의 이의 ■ 청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제5장 조선 개혁과 청한 종속 문제에 관한 개설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의 충돌 ■ 조선 내정 개혁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여론 ■ 조선 문제에 관한 주제와 객제의 관계

제6장 조선 내정 개혁 제1기
청장淸将 섭지초葉志超가 위안스카이에 보낸 전보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기밀 훈령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건의 ■ 조선 국왕, 스스로 죄가 있다는 조서를 발포発布함 ■ 오토리 공사에게 최종 수단을 취하라는 전훈電訓 ■ 오토리 공사, 조선 정부에 최종 공문을 보냄 ■ 위안스카이, 돌연 귀국 ■ 용산 주둔 제국군대가 경성에 들어감 ■ 원군의 입궐 ■ 조선 국왕, 오토리 공사의 참내參內 요청 ■ 선전宣戰의 조칙

제7장 구미 각국의 간섭

러시아의 권고
이홍장과 카시니 백작의 담판 ■ 러시아 정부의 권고 ■ 러시아 정부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러시아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함께 철수하라는 권고 ■ 러시아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본 정부의 회답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공문 ■ 러시아 정부로부터 일본 제국의 조선에 대한 요구 중 적어도 조선과 열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을 위배하는 조건이 있을 경우 러시아 정부는 결코 이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의注意

영국의 중재
베이징 주재 영국 특명전권공사 오코너와 총리아문의 협의 ■ 영국의 중재 ■ 오코너의 거중居中 주선에 따라 고무라小村 대리공사가 총리아문을 방문하였으나 청국 정부는 어떤 새로운 안을 제시하지 않음 ■ 제국 정부, 고무라 대리공사에게 전훈하여 청국에게 일본 정부의 제2차 절교서를 선언하게 함 ■ 청국 정부가 러시아의 중재에 중점을 두었던 이유 ■ 영국 정부의 2차 중재 ■ 영국의 2차 중재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일본 정부의 금번 청국 정부에 대한 요구는 일찍이 담판의 기초로 삼겠다고 확언한 바와 모순되고 또 그 범위를 벗어났으므로, 만약 이런 정략을 고집하여 일청 양국이 개전하게 되면 일본 정부는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선언 ■ 이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향후 일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청국의 상하이 및 그 근방에서 전쟁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두고 싶다는 공문 통보 ■ 영국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조선을 점령하고 서서히 양국이 협의할 것을 권고

미국의 충고
미국의 충고 ■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회답

다른 열국과의 관계
구미 각국의 국외 중립

제8장 6월 22일 이후 개전까지의 이홍장의 위치
이홍장의 외교 방책과 군사 전략 ■ 이홍장의 출신과 경력 ■ 장발적長髮賊 ■ 염비捻匪 ■ 톈진 소동 ■ 청국 황제, 이홍장의 실책을 문책하여 그 득실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설치를 명함

제9장 조선 사건과 일영조약 개정
조약개정의 역사 ■ 조약개정안 조사위원에게 내린 조칙 ■ 반면적 대등조약안 계통의 변경 ■ 우리 정부, 영국 정부와 조약개정의 담판을 재개 ■ 양이적攘夷的 보수론의 유행 ■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정부가 고용한 칼드웰 건 및 일본 군용 전신이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를 관통하여 가설된 사건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기까지 신조약의 조인을 거절한다는 통첩 ■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영조약의 조인 ■ 여순旅順 학살사건과 일미조약과의 관계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청한 종속 관계에 관하여 조선 정부가 구미 각국에 보낸 공문 ■ 거문도巨文島 사건 ■ 아산 전투 개시 전의 관련된 대한対韓 정략 ■ 고승호高陞號 사건 ■ 위 사건과 관련한 아오키青木 공사의 전보 ■ 위 사건과 관련한 영국 정부의 공문 ■ 위 사건에 관한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보고 ■ 홀랜드 및 웨스트레이크 두 박사의 의견

제11장 조선 내정 개혁 제2기
잠정 합동 조관條款 ■ 일한 공수攻守동맹조약 ■ 대원군의 복수 정략 ■ 김金, 어魚 내각 ■ 정혁파와 군국기무처 ■ 대원군 및 조선 내각 각료들이 평양 주재 청국 장수와 내통한 밀서의 탄로 ■ 조선 국토를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그 절반을 점령한 상태 ■ 대한対韓 정략 관련 각의 ■ 조선에서의 철도 및 전신 문제 ■ 오토리 공사의 소환과 이노우에井上 백작의 부임

제12장 평양 및 황해 전승의 결과
평양, 황해 전승에 대한 구주 각국의 여론 ■ 평양, 황해 전승 후 우리 국민의 희망 ■ 내외 사정의 충돌

제13장 영사재판제도와 전쟁과의 관계
치외법권과 영사재판제도의 구별 ■ 영국인 피고트의 영사재판론 ■ 미국인 죠지 카메론과 존 와일드 사건 ■ 이 사건에 관한 영국 공사의 항의 ■ 위 사건에 관한 일본・프랑스 양국 정부의 쟁의 ■ 이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의 항의 ■ 사세보佐世保 포획심검소에서 영국 상선 익생호益生号를 재판하다 ■ 장발적난長髮賊乱 시대에 청국에서의 구미 각국의 영사재판권 남용

제14장 강화 담판 개시 전 청국 및 구주 여러 강국의 거동
청국 각 성의 총독 및 순무巡撫가 강화의 득실에 관해 상주上奏한 의견 ■ 데트링, 고베에 오다 ■ 데트링 사명의 목적 ■ 영국 정부가 시도한 구주 제 강국의 연합 중재 ■ 영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대해, 조선의 독립과 군비상환의 두 조건으로 다시 중재를 요청함 ■ 영국의 제의에 대한 회답안 ■ 영국 정부의 제의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의 연합중재설의 실패 ■ 영러 양국이 일청 양국에 대한 상태에 관한 독일 황제의 혹평

제15장 일청 강화의 발단
미국 정부가 우의적 중재를 하겠다고 제의해 옴 ■ 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청국 정부, 베이징・도쿄 주재 미국 공사를 거쳐 우리 정부에게 강화 회담을 열 것을 제의해 옴 ■ 청국 정부, 장張・소邵 두 사절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첩해 옴 ■ 강화 조건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의 희망 ■ 우리 정부가 청국에 요구한 강화 조건을 구미 각국에 예고할 것인가에 관한 각의 ■ 강화조약에 관한 히로시마 대본영에서의 어전회의 ■ 이토 내각총리대신의 주언奏言 ■ 이토 내각총리대신과 내가 전권변리대신에 임명되다

제16장 히로시마 담판
청국의 장張・소邵 두 사신의 도착 ■ 제1차 히로시마 담판 ■ 2차 히로시마 담판 ■ 이토 전권변리대사의 연설 ■ 이토 전권대사가 오정방에게 한 사담 ■ 장・소 두 사절의 귀국

제17장 시모노세키 담판(상)

청국 두등대신頭等大臣 이홍장이 찾아 옴
청국 정부, 미국 공사를 경유하여 이홍장을 두등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지해 오다 ■ 이홍장,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다 ■ 제1차 시모노세키 담판 ■ 청국 전권대신, 휴전을 제의하다 ■ 제2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 제의에 관한 우리나라 전권대신의 회답 ■ 제3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문제 철회

이홍장의 조난遭難 및 휴전조약
이홍장의 조난 ■ 이토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가다 ■ 제4차 시모노세키 담판 ■ 이토 전권대신, 시모노세키에 돌아와 휴전조약에 조인

제18장 시모노세키 담판(하)

강화조약의 조인
우리의 강화조약안을 청국 사신에게 송달하다 ■ 이에 대한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 ■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에 대한 우리 전권대신의 반론 ■ 이경방李経方, 흠차 전권대신에 임명되다 ■ 청국 전권대신이 일본의 강화조약안에 대해 수정안을 제출하다 ■ 제5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수정안에 대한 일본 전권대신의 재수정안 제출 ■ 제6차 시모노세키 담판 ■ 제7차 시모노세키 담판 ■ 강화조약의 조인 ■ 청국 전권대신의 귀국 ■ 우리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돌아간 즉시 행재소를 참내하여 조약조인 결과를 복명하다 ■ 강화조약 및 별약의 비준과 내각 서기관장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전권대신으로 지부芝罘에 파견되다 ■ 강화조약 비준교환을 완료함

제19장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상)

3국간섭에 대한 정부의 조치
러시아의 충고 ■ 히로시마 행재소에서의 어전회의 ■ 마이코舞子 회의 ■ 3국간섭에 관해 니시西 공사에게 보낸 1차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가토加藤 공사에게 보낸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구리노栗野 공사에게 보낸 전훈 ■ 니시 공사의 답전 ■ 가토 공사의 1차 회신 ■ 가토 공사의 2차 회신 ■ 구리노 공사의 회신 ■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보 ■ 니시 공사에게 보낸 2차 전훈 ■ 니시 공사의 회신 전보 ■ 교토의 회의 ■ 제국 정부, 러・독・프 3국 정부에게 봉천반도 포기를 약속함

제20장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중)

3국간섭의 유래
3국간섭 전후 러시아의 형세 ■ 러시아 정부가 일・러 양국 정부 사이에 상호 의견 교환을 권유 ■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가 재차 일・러 양국이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의 ■ 니시 공사의 기밀 서신 ■ 3국간섭 전후의 독일의 형세 ■ 독일의 표변에 대한 아오키 공사의 전신 보고 ■ 독일이 러시아・프랑스와 동맹한 것에 관한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신 ■ 영국 주재 독일대사와 가토 공사의 담판에 관한 동 공사의 전신 보고 ■ 3국간섭 전후의 프랑스의 형세

제21장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하)

결론
요동반도 반환 후 국민의 불평 ■ 당시 내외의 형세 ■ 산 스테파노San Stafano 조약

해설: 『건건록』 간행 사정/ 교주校注/ 역자해제/ 색인


『건건록』과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의 저자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 역사와 메이지시대 일본 정치외교사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낯설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 외교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청일전쟁(1894~1895)’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가 청일전쟁 발발과 경과, 그리고 삼국간섭 등의 수습을 외교적으로 ‘지도指導’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 이 책 『건건록』이다.
건蹇은 ‘한 쪽 다리를 절름거린다, 즉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건건蹇蹇’은 『역경易經』의 제39괘인 「건괘蹇卦」의 “왕신건건, 비궁지고王臣蹇蹇, 匪躬之故[임금과 신하가 험난한(절름거리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를 두지 않음이다(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에서 따 온 것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은 청일전쟁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이익을 위해 군주와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평가 받는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는 일본 역대 외무대신 중 무쓰 무네미쓰만 유일하게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쓰는 조선멸시·낙후·정체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쓰 외교’의 핵심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주권과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반평화적·반인도적·반민족적 인식의 현실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 사회는 여전히 무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의 본질: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메이지27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年日淸戦史』를 통해 “조선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국과 싸웠다”고 청일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과연 그러한가.
무쓰 무네미쓰는 이 책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첫머리에서 “청일전쟁에서는 육지와 해상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오직 ‘아산 전투’만 외교가 앞서서 전쟁의 발단을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쓰는 이 책에서 스스로 청일전쟁의 목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책의 행간과 교주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철저한 교주 및 해설에서 우리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의 최초 무력충돌이 1894년 7월 25일의 ‘풍도해전’이라고 소개하며 대부분의 일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쓰의 지휘 아래 오토리 조선 주재 일본공사가 실행한,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최초의 무력충돌이다. 이른바 7·23 사변, 즉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청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에 따라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이 책에서 무쓰는 이를 시인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먼저 조선 국왕을 우리 수중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본서 141~142쪽)”고 했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은 뒤 조선 정부로부터 “아산의 청국 군대를 몰아내는 위탁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내게 된 것”(본서 140쪽), 바로 그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곧 조선의 망국이었다.

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
『건건록』은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인쇄하여 1896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외교 기밀에 관련된 비밀문서로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9년 1월 이와나미 출판사가 『백작 무쓰 무네미쓰 유고』를 전문과 함께 출판하면서 비로소 대중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칭송받으며 읽히는 명저이다.
한국에서는 두 차례 번역되었으나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선행 서적에서 일부 오역과 오류, 오식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바로 잡고 청일전쟁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상세한 해설과 교주를 추가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대로 된 한국어판이라 할 수 있다. 나카쓰카 아키라는 『건건록』 출판과정 및 초고와 간행본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비교하여 청일전쟁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받는다. 외교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무쓰 스스로 서언에서 밝히기도 했으며, 후대의 연구에서도 무쓰가 청일전쟁의 외교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다른 외교기록 문서와 비교하면 무쓰는 일본에 불리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 나카쓰카 아키라의 교주는 『건건록』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고 개변된 부분의 원 문장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해설 또한 80년대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무쓰의 퇴고의 흔적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무쓰의 심정을 추적하고, 청일전쟁기에 일본외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망국의 원인을 되새기고 반성하다
‘청일전쟁’ 그 자체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먼 옛날 중국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두 나라만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영유하기 위해 싸웠다는 사실, 그 전쟁이 이 나라와 민중의 삶을 짓밟고, 민중의 재산과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한 결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기반을 구축한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문제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오늘날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할 정치외교적 이슈가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 존립의 근거는 국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국익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에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건건록』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읽는 내내 뼈아플 것이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그 맥락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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