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건희 - 삼성 신경영을 구상하다 (명진규, 2013)

시나리오/인물|2022. 10. 13. 08:00

책소개
현직 삼성 출입기자가 처음 밝히는 청년 이건희의 모든 것이 담긴 책.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이론을 담거나 그의 행보에서 경영 법칙을 찾아내는 대신 그의 청소년과 청년 시절에서 신경영의 원동력을 찾아 나섰다. 현직 삼성그룹 출입기자인 저자는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인 삶에서 어떤 소양을 갖추게 됐는지, 신경영 이후 그 소양들이 어떻게 발현됐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취재해서 담았다.


목차
시작하며 청년 이건희, 신경영을 구상하다

chapter 1 지식사회의 해답, 청년 이건희에게서 찾다
지식사회, 그리고 청년 이건희
이건희의 비밀, ‘무한탐구’
이건희 ‘천재론’의 재해석
삼성가 교육 철학, 어떻게 다른가?
父 이병철, “스스로 깨우쳐라”
母 박두을, 엄하지만 자유 의지를 존중한 현모양처
인문학+신기술의 접점을 찾다
삼성가 3대에 걸친 ‘인문학 사랑’

chapter 2 소년 이건희, 장난감에서 사물의 구조를 연구하다
“나는 줄곧 혼자였다”
과묵한 외톨이, 초등학생 이건희
전쟁의 불안, 공포 속에서 사색의 창을 열다
경영상의 난제를 ‘숙려단행’으로 풀어내다
이건희 회장의 독특한 습관, 3개의 집 그리고 똑같은 방
누군가에게는 장난감, 이건희에게는 연구 대상
반도체 전문가, 이건희 회장에게 한 수 배우다
이건희의 혁신, ‘상식을 깨라? 상식대로 생각하라!’
이건희 회장의 지하 작업실
“업의 본질을 이해하라”

chapter 3 영화에서 사람, 스포츠에서 삶을 배우다
열두 살의 나이에 낯선 땅 일본을 밟다
지긋지긋한 일본, 하지만 평생의 목표가 된 일본
평생을 함께한 애견, 그리고 진돗개
어린 나이의 타향살이, 지역전문가 제도의 시작
영화에 빠져들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 연구하다
“나는 사람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함께 점심을 먹어라
레슬링 10단 이건희, 그가 배운 삶
스포츠맨십에서 배운 삶과 인생, 끝없는 투지와 끈기

chapter 4 청년 이건희, 세계로 향하다
“건희야, 선진국을 배우고 와라”
끝나지 않은 공부, 미국에서의 새 삶
6년의 유학 생활, 이건희의 위기의식
이건희의 경영 동반자, 일본 경제단체연합회
평생의 스승 홍진기, 평생의 멘토 홍라희와의 만남
방송으로 시작한 경영 활동

chapter 5 경청과 목계의 비밀
순탄치 않았던 형제들과의 경쟁, 그리고 경영 승계
경청, 목계의 비밀
이건희의 결심, ‘나는 삼성의 메기다’
잭 웰치 그리고 도요타
은둔의 경영자
“삼성 제품은 저 구석 창고 앞으로 가보세요”
“이럴 수가, 삼성은 3류였다”, 후쿠다 보고서
양적 성장의 부작용, 몰래카메라 경영

chapter 6 신경영 선언
프랑크푸르트 선언,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끊임없는 경영 혁신, 7.4제와 정보 관리
말로 안 될 때는 행동으로, ‘휴대폰 화형식’으로 보여 준 충격 요법
“여직원들 근무복 없애라”
“고객님, 삼성의 이건희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호통, 그리고 IMF
탱크가 점령한 러시아, “삼성은 러시아를 떠나지 않습니다”
삼성자동차의 실패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chapter 7 청년 이건희, 창의적 인재를 찾다
삼성 교육의 산실 인력개발원
SBC와 ‘신경영 달걀’
이건희 회장의 인사 철학
“회장님, 3년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발렌베리와 삼성
“가난의 대물림 해결, 삼성이 나서 보자”
이건희 회장의 남겨진 숙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청년 이건희의 창조성과 통찰력이 없었다면, 지금 삼성 신경영은 없다!”

현직 삼성 출입기자가 처음 밝히는 청년 이건희의 모든 것
삼성 신경영 선언 20주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며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의 삼성은 세계 시장에서 삼류에 불과했다.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TV는 삼성의 과거를 상징한다. 전자 업계는 선진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일본 소니와 파나소닉은 물론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 휴렛팩커드, IBM이 세계 시장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작게는 삼성이라는 삼류 회사를 일류 회사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크게는 삼성 임직원들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양의 개념에서 질의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2013년 현재 삼성은 세계 최고의 회사로 자리 잡았다. 신경영 선언 후 2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삼성그룹은 매출 29조 원에서 380조 원으로 13배, 세전 이익 8천억 원에서 38조 원으로 47배, 총자산 41조 원에서 543조 원으로 13.2배, 시가 총액 7.6조 원에서 338조 원으로 44배 증가하면서 글로벌 100대 브랜드 세계 9위로 진입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는 21년간 단 한 번도 1위를 놓쳐 본 적이 없으며,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북미 시장을 제외하고는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년 동안 삼성은 수백 개의 계단을 뛰어오르며 세계 최고의 회사로 자리 잡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매년 ‘위기’와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한 ‘연구’를 언급하고 있다. 신경영 20주년을 맞이한 소감에서조차 그는 “20년이 되었다고 안심해도 안 되고 항상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더 열심히 뛰고, 사물을 깊게, 더 멀리 보고 연구해야 합니다”라며 또 한 번 ‘위기’와 ‘연구’를 강조했다. 위기는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고, 연구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평생을 사물과 사람, 삶과 경영에 대해 연구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바로 삼성 신경영 신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신경영 신화의 원동력, 인간 이건희의 청소년과 청년 시절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이 있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삼성은 한때 수입업으로 몸집을 키워 나갔다. 그러다 단순한 유통에 그치지 않고 제조업에 나섰다. 그 이후부터는 세계 유수 거인들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이건희 회장의 세상에 대한 연구와 통찰력, 과감한 실행력, 흔들림 없는 투지는 삼성의 무기가 됐다.
어린 이건희는 우리가 말하는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부유한 가정환경이긴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과 생각이 많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10대에는 재벌가 2세라는 점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고, 20대에는 조용하고 생각 많은 청년이었으며, 30대에는 실패와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40대부터 그는 탁월한 통찰력과 거침없는 도전을 바탕 삼아 삼성을 세계 전자 시장의 거인으로 만들었다.

- 외톨이 소년 이건희, 장난감에서 사물의 본질을 깨닫다
이건희 회장의 일생은 ‘무한탐구(無限探求)’로 점철되어 있다. 사물에 대한 탐구, 사람에 대한 탐구는 지금도 끝이 없다. 그의 탐구 방식은 끊임없는 질문과 막힘없는 사색이다. 그래서인지 이건회 회장은 아무리 세계 1등 품목을 만들어도 “아직 멀었다”고 답한다.
이건희 회장의 무한탐구는 초등학교 시절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물론, 형제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3남 5녀라는 대가족이었음에도 그는 항상 외톨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3년 동안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통에 아버지 앞에서 재롱이나 투정을 부릴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장난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장난감이지만 이건희 회장에겐 직접 뜯어 보면서 구조를 익히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성장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자전거, 텔레비전, VTR, 카메라, 심지어 자동차까지 분해하고 조립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건희 회장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고민하고 혼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 청년 이건희, 영화와 스포츠로 사람 공부를 하다
1954년 이병철 선대 회장은 향후 기업의 성장을 책임지려면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초등학생 5학년이었던 이건희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미 큰형 이맹희와 작은형 이창희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어린 이건희에게 일본이란 나라는 차별과 외로움만 안겨 준 곳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일본에서 보낸 시간은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이건희에게 주어진 공간은 학교와 하숙방 한 칸, 그리고 영화관이었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영화관으로 곧장 달려갔다. 동시 상영관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3년 유학 생활 동안 본 영화가 1천여 편에 이르렀다. 하루 한 편 이상 꼬박꼬박 본 셈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영화에 빠져 사는 이건희를 혼내지 않았다. 이건희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화 이야기와 영화 속 사람들의 인생을 즐겨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청년 이건희는 세상을 배우고, 사람에 대해 연구했다. 어린 시절 취미 생활로 시작한 영화 보기는 이건희 회장에게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거울이 되었다.
첫 일본 유학 시절에 소년 이건희가 겪은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설움이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조선인 아이일 뿐이었다. 그때 그의 눈을 사로잡은 인물이 프로 레슬러 역도산이었다. 당시 역도산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국민적 영웅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청소년 이건희는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한다. 레슬링은 부상도 흔하다 보니 부잣집 도련님이 즐길 만한 운동이 아니었지만, 그는 레슬링 선수 생활을 고집한다. 레슬링을 하면서 이건희는 강한 투지와 끈기,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습득한다.동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람 공부에 눈뜨기도 한다.
당시 이병철 선대 회장이 간부 한 사람을 내친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이건희는 그 간부의 복권을 아버지에게 고집스럽게 권유했다. 결국 그 간부는 복권되어 삼성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건희의 고교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이 “고등학생이 뭘 안다고 나서느냐?”며 나무라자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청년 이건희, 세계를 돌면서 글로벌 감각을 키우다
6년 동안의 일본과 미국 유학 생활은 청년 이건희에게 급변하는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전자 왕국으로 거듭 나고 있었고,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그만큼 세계는 급변하는 하는데, 여전히 한국은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굶주린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유학 생활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한 국제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혁신이 청년 이건희에게 미래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난 청년 이건희, 삼성 신경영의 초석을 만들다
이건희 회장은 창의적인 인재였다. 스티브 잡스가 디지털 기기와 플랫폼을 연계한 창의적인 사고를 발휘해 애플을 세계 최고의 IT 회사로 만들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건희 회장이 가진 통찰력의 원천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생각의 힘’이다. 그가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 일을 가리켜 ‘연구’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와 ‘무한탐구無限探求’의 정신, 그리고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발상의 전환 대신 가장 상식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해답을 내놓는 과정은 우리가 흔히 결론을 내리는 방법과는 사뭇 다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상식에 가까운 방법으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매겨져야 한다. 《청년 이건희》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이론을 담거나 그의 행보에서 경영 법칙을 찾아내는 대신 그의 청소년과 청년 시절에서 신경영의 원동력을 찾아 나섰다. 현직 삼성그룹 출입기자인 저자는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인 삶에서 어떤 소양을 갖추게 됐는지, 신경영 이후 그 소양들이 어떻게 발현됐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취재해서 담았다.
창의적인 인재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무한한 호기심과 깊은 사고, 끝없는 배움의 열정, 그리고 모든 사물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통찰력에서 생겨난다. 이건희 회장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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