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피터 게이, 2011)

시나리오/철학-교육|2022. 10. 29. 14:00

책소개
인문학의 거인 피터 게이가 쓴 프로이트 평전. 서구 근대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의 대가인 역사학자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에서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명민한 유대인 소년이 세기말 빈에서 정신분석이라는 독창적 이론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정신분석 조직의 수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촘촘히 재구성해 보여준다.

10년에 걸친 연구와 2년 반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된 <프로이트>는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학계와 일반 독자들에게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치 한 편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 탁월한 문장 감각과 명쾌한 비유,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 시각으로 최고의 프로이트 전기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또한 2년에 걸쳐 200자 원고지 6,600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한국어판 <프로이트>를 완성한 번역가 정영목의 유려하고 섬세하고 정확한 문장이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1권이 정신분석의 탄생과 학문으로서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보여준다면, 2권에서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 《자아와 이드》, 《문명 속의 불만》 등을 통해 초기 이론의 대대적인 수정과, 개인의 차원을 넘어 종교와 예술, 문화 분석의 도구로 영역을 확장한 정신분석을 만나게 된다.


목차
프로이트 차례
프로이트Ⅰ
■ 머리말
■ 들어가는 글 - 스핑크스의 정복자, 오이디푸스

1부 무의식의 탐험가(1856~1905)
1장 앎의 의지
“지식에 대한 욕망 때문에 마음이 의학으로 기울었다.”
위대함을 향한 갈망
신을 믿지 않는 의학도
사랑에 빠지다

2장 무의식의 탐사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친구 그리고 적
히스테리 환자들
오이디푸스 전투

3장 정신분석의 탄생
“내가 높은 곳에 있는 권세들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지옥을 움직이리라.”
《꿈의 해석》
햄릿들의 시대
미켈란젤로의 <모세>
성욕과 리비도

2부 정신의 정복자(1902~1915)
4장 투사와 정신분석가
“우리는 새로 발견된 땅의 개척자들 같았고, 그 지도자는 프로이트였다.”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다
정신의 고고학자
수요심리학회
정신분석의 씨족 구성원들

5장 정신분석 정치학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니, 저들이 학문의 운명을 바꾸지 못할 걸세.”
황태자, 융
1909년, 미국 방문
아들러 추방
융과 결별하다

6장 정신분석의 환자들
“인간은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손가락 끝으로 수다를 떤다. 모든 구멍을 통하여
비밀이 드러난다.”
도라의 사례
꼬마 한스와 쥐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분석
늑대 인간의 정치
정신분석의 기법

7장 정신의 지도 그리기
“정신 생활은 대체로 지속적인 전쟁 상태다.”
문화의 정신분석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 정복
나르시시즘과 리비도
문명의 자기 파괴

■ 약어 설명
■ 주석
■ 찾아보기

프로이트Ⅱ
■ 감사의 말
3부 문명의 해부학자(1915~1939)
8장 전쟁과 인간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기도 하다.”
충동, 억압, 무의식
전쟁과 평화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드, 자아, 초자아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
“나는 유명하지 않습니다. 악명이 높지요.”
구강암에 걸리다
안나, 안티고네
프로이트주의의 대유행
정신분석의 분화

10장 여성과 정신분석
“해부학이 운명이다.”
랑크와 출생 트라우마
정신분석 자격 논쟁
여자, 암흑의 대륙

11장 문명 속의 불만
“인간은 문명 없이 살 수 없지만, 문명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
종교라는 환상
문명의 딜레마
미국을 혐오하는 사람
괴테 상을 받다

12장 인간 모세의 최후
“나는 학생 때부터 늘 용감한 반대자였고, 대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히틀러라는 재앙
무신론자 유대인
빈을 떠나다
금욕주의자의 죽음

■ 약어 설명
■ 주석
■ 문헌 해제
■ 프로이트 연보
■ 옮긴이 후기
■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의식의 탐험가, 정신의 정복자, 문명의 해부학자
20세기 인문의 지형을 바꾼 정신분석 혁명가에 관한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평전 !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푼 현대의 오이디푸스, 지크문트 프로이트.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에 이어 서구 지성사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일으킨 불온한 과학자, 정신의 광대한 미개척 지대인 무의식을 탐사하고 최초로 정신의 지도를 그린 정신의 탐험가였다. 프로이트가 창조한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을 넘어 철학, 심리학, 문화 이론으로서 인류의 지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프로이트는 인류에게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심리학적 모욕을 가했다. 그는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노예의 위치로 끌어내린 환상의 파괴자였다. 또한 그는 정신분석이라는 무기를 들고 인간 집단의 삶의 기초를 이루는 예술, 종교, 문명의 뿌리까지 파 들어간 문명의 해부학자였다. 프로이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과거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언제나 맹렬한 증오와 열렬한 추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만큼이나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신분석의 황태자에서 가장 냉랭한 적이 되어 프로이트와 결별한, 집단무의식의 아버지 카를 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융의 분석심리학, 알프레트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멜라니 클라인의 아동심리학, 안나 프로이트의 자아심리학, 에릭 번의 교류분석 이론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심리학은 프로이트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심리학을 넘어 철학, 사회학, 문학, 교육학, 신학 등 많은 학문 영역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인간 주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 루이 알튀세르

그에게는 신앙도, 꿈도, 인류의 의미나 임무도 문제되지 않는 광대한 무한까지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꿈의 해석》은 나에게 일생일대의 발견이다. 내 꿈만이 아니라 내 인생 경험도 바로 여기 나와 있다. ― 살바도르 달리
서구 근대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의 대가인 역사학자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에서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명민한 유대인 소년이 세기말 빈에서 정신분석이라는 독창적 이론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정신분석 조직의 수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촘촘히 재구성해 보여준다. 10년에 걸친 연구와 2년 반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된 《프로이트》는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학계와 일반 독자들에게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치 한 편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 탁월한 문장 감각과 명쾌한 비유, 편향되지 않은 객관적 시각으로 최고의 프로이트 전기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인간 주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 루이 알튀세르

그에게는 신앙도, 꿈도, 인류의 의미나 임무도 문제되지 않는 광대한 무한까지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꿈의 해석》은 나에게 일생일대의 발견이다. 내 꿈만이 아니라 내 인생 경험도 바로 여기 나와 있다. ― 살바도르 달리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푼 현대의 오이디푸스,
최초로 정신의 지도를 그린 무의식의 탐험가,
인류의 지적 패러다임을 바꾼 사유의 혁명가를 만나다

이 책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명민한 유대인 소년이 세기말 빈에서 정신분석이라는 독창적 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정신분석 조직의 수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촘촘히 재구성해 보여준다. 성(性)과 인간 정신에 대한 대담한 발견으로 시대와 불화했던 불온한 과학자이자 동시에 전형적인 19세기 부르주아 신사였던 프로이트의 양면이 깊이 있게 밝혀진다.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연구자로서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의 대부분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의 철저한 자기 분석에서 잉태되었다.
그는 시간 낭비라고는 몰랐던 일중독자, 30여 차례가 넘는 혹독한 암 수술을 이겨낸 뒤에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 통제한 금욕주의자,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도 정신분석이라는 씨앗을 거대한 숲으로 일군 노련한 조직가였다. 중독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순의 인물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을 스스로 정복자라 불렀다. 이 책은 그의 정복의 역사다. 그 정복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 프로이트 자신의 정복이었음을 이 전기는 보여준다.

1권은 1856년 5월 6일 프로이트의 출생부터 세계의 비밀에 대한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의학도의 길을 선택한 청년 시절, 뇌와 신경을 연구하던 뛰어난 신경학자에서 무의식을 탐구하는 심리학자로의 변신, 1890년대 말 정신분석의 탄생과 1910년대 이론적 정교화 시기까지를 다룬다. 저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유아 성욕’ 등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과, ‘도라’ ‘늑대 인간’ ‘쥐 인간’ 같은 유명한 정신분석 환자들의 사례, 정신분석의 기념비적 저서인 《꿈의 해석》에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거쳐 《토템과 터부》에 이르는 주요 저서와 논문들의 의의와 내용을 프로이트의 개인적 삶과 하나로 녹여 명쾌하게 설명한다.
2권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부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해 이듬해 죽음을 맞기까지를 다룬다. 1권이 정신분석의 탄생과 학문으로서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보여준다면, 2권에서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 《자아와 이드》, 《문명 속의 불만》 등을 통해 초기 이론의 대대적인 수정과, 개인의 차원을 넘어 종교와 예술, 문화 분석의 도구로 영역을 확장한 정신분석을 만나게 된다.

왜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인가?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프로이트 평전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는 그동안 국내 독자들에게 암암리에 널리 알려진 책이었다. 정신분석 관련 도서의 참고문헌과 추천도서 목록에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이 당연하게 올라가 있고, 심리학자와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꼭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회자되어 왔다. 프로이트 본격 전기로는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자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프로이트 전기 가운데 단 두 종만이 프로이트 연구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첫 번째 책은 프로이트의 최측근이었던 영국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3권으로 발표한 《Sigmund Freud : Life and Work》이다. 정신분석 운동과 프로이트의 개인적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였던 존스는 그러나 프로이트의 전기 작가로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기 작가가 되는 사람은 거짓말, 은폐, 위선, 윤색이라는 죄, 심지어 자신의 이해 부족을 감추는 죄까지 짓습니다. 전기적 진실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설사 얻는다 해도 이용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생전에 프로이트는 그의 전기를 쓰겠다고 제안한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간단히 말해 프로이트는 전기 쓰는 일을 전혀 신용하지 않았다. 전기 작가는 어떤 주인공을 선택하든 그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기 때문에 이상화 작업이 될 수밖에 없고 진실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존스의 프로이트 전기는 바로 그 이상화의 늪에 빠졌다. 오늘날 그의 전기는 스승에 대한 경의를 담아 쓴 ‘스승님 찬가’라는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어니스트 존스의 ‘스승님 찬가’를 대신할 책은 1988년 피터 게이의 손에서 탄생했다.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는 오늘날 가장 엄정하고 믿을 수 있는 프로이트 전기로 평가받는다. 게이는 어니스트 존스의 전기를 바탕으로 프로이트가 쓴 모든 저서와 논문, 그와 관련된 모든 2차 문헌, 어니스트 존스가 전기를 쓸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수백 통의 편지까지 망라해 프로이트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또한 피터 게이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영국 등을 오가며 프로이트에게 직접 분석을 받았던 일반인들과 정신분석가들을 찾아 직접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피터 게이는 존스가 고의로, 혹은 정보 부족으로 잘못 서술했던 내용들을 상당 부분 바로잡았다.

최적의 프로이트 전기 집필자 피터 게이
피터 게이는 두 가지 점에서 프로이트의 전기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다. 프로이트의 저서를 이해하려면 정신분석 이론을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프로이트는 의과대학에 들어가 과학자로 훈련받았으나, 니체와 포이어바흐에 심취한 청년 시절을 보냈고 고고학, 오페라, 고전, 예술, 역사, 외국어 등에 두루 능통한 인문학적 천재였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에 못지않은 인문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전공인 계몽주의와 문화사는 물론이고 음악, 정치사상사, 철학에 전문가적 수준의 학식을 갖춘 전방위 인문학자로서 피터 게이는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와 닮은꼴이다.

피터 게이는 직접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정신분석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프로이트 전기를 쓰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원 시절부터 프로이트에 관심을 두었으나 1970년대 중반 직접 ‘웨스턴 뉴잉글랜드 정신분석 연구소’에서 분석 훈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 역사가로서 연구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후 역사 연구에 정신분석을 도입하면서 ‘역사학계의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프로이트》는 출간 후 전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프로이트 전기로 꼽히고 있다. 게이는 “이 책을 쓰는 동안 평생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신분석의 메스로 프로이트의 삶을 해부하다
《프로이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끊임없이 프로이트를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을 최초로 만든 사람에게 그 칼을 들이대는 셈인데, 이것은 주로 프로이트가 공개하지 않은 내용이나 자기 분석을 중단한 지점에서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된다. 그 결과 다른 전기에서는 볼 수 없는 면, 간혹 프로이트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면들이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환자들을 분석한 것처럼 프로이트가 한 실언이나 실수, 농담, 그가 돌연 자기 분석을 중단한 지점에서 정신분석을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프로이트의 내적 삶과 외적 삶,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의 역사까지 3박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단순히 사실들을 쌓아올려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는 연대기적 전기의 차원을 넘어 진실로 어엿한 평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인간이 비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사람은 입이 말을 하지 않으면 손가락 끝으로 수다를 떤다. 속에 있는 것은 모든 구멍을 통해 밀고 나온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사례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 말은 그의 분석 대상자만큼이나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고고학자로서 오랫동안 경쟁자 없는 활동을 해 오면서 많은 이론, 관찰 조사, 치료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런 것들은 꼼꼼한 전기 작가의 손에 들어가면, 프로이트의 소망, 불안, 갈등, 즉 무의식으로 남아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삶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상당한 동기들을 드러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그의 발견, 또 가능한 한 그의 방법들을 활용하여 그 자신의 삶의 역사를 탐험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 1권 <들어가는 글>(23~24쪽)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삶에서 눈에 띄는 모순 가운데 하나로 시가(cigar) 중독을 들 수 있다. 그는 중독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중독의 대가는 구강암 발병과 33차례의 고통스런 수술,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시가에 중독되었음을 인정했고, 흡연이 궁극적으로 모든 중독의 원형인 자위의 대체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그의 정신에는 그의 자기 분석도 결코 이르지 못했던 깊은 곳, 그의 분석으로도 해소할 수 없었던 갈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담배를 끊지 못함으로써, 그가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부른 너무나 인간적인 상황, 이성적으로 이해는 하면서도 적절하게 행동하지는 못하는 상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 생생하게 보여준 셈이다.
― 2권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139~140쪽)에서

1급 번역가 정영목의 로망, 드디어 실현되다
이전에 《융》 전기를 번역한 적도 있는 번역가 정영목 씨는 한 인터뷰에서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번역해보는 것을 번역가로서 자신이 품고 있는 로망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씨네21 680호, 2008년)
2년에 걸쳐 200자 원고지 6,600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한국어판 《프로이트》를 완성한 번역가 정영목의 유려하고 섬세하고 정확한 문장이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프로이트, 인간과 문명의 근간을 뒤엎은 불온한 혁명가
오늘날 프로이트는 마르크스, 니체와 더불어 20세기 현대 철학의 지평을 연 3대 사상가로 불린다. 또는 서구 지성사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일으킨 지적 혁명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꼽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를 정신의 3대 혁명가로 꼽은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발견이 지성사적 성취이자 일종의 재앙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약간 신파조로 정신분석은 인류의 과대망상에 역사적인 세 가지 상처 가운데 세 번째 상처를 입혔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입증했다. 다윈은 인류를 동물의 왕국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그, 프로이트는 세상을 향하여 자아란 대체로 정신의 무의식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힘들의 하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 《프로이트Ⅱ》 9장 180쪽”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깨뜨렸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은 신이 창조한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을 박살냈다. 다윈에 의해 인간은 동물로 전락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인류에게 치명적인 심리학적 모독을 가했다.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을 사유하는 이성적 존재,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인간은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식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원초적인 충동과 소망들로 가득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하인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과거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무의식의 탐험가, 정신의 정복자
프로이트는 정신의 광대한 미개척 지대인 무의식을 탐사하고 최초로 정신의 지도를 그린 정신의 탐험가였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을 ‘무의식-전의식-의식’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3차원적 구조로 설명한 것은 혁명적 발상이었다. 그때까지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의식’이 정신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더 큰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인간의 정의와 이해를 송두리째 뒤엎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간 정신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의식이 억압하고 배제해 의식 너머 어두운 곳에 묻어버린 것이다. 프로이트가 즐겨 사용했던 빙산의 비유로 보자면, 의식은 수면 위로 보이는 빙산의 윗부분처럼 정신의 작은 부분일 뿐이고 무의식은 빙산의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며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프로이트가 볼 때 무의식은 현대 문명이 억압하는 인간의 욕망과 원초적 충동들이 들끓는 “정신의 지하 세계”였다.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의 개념과 이론을 독창적인 비유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특징인데, 무의식에 대한 설명 역시 매우 흥미롭다.

무의식은 대부분 억압된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화를 따르자면 이 무의식은 일시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쉽게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생각들을 품고 있는 정신의 한 구역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 구역을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이라고 불렀다. 무의식은 최대 보안 시설을 갖춘 감옥을 닮았다. 이곳에는 반사회적 재소자들이 오랫동안 고달프게 살고 있다. 또 최근에 입감한 재소자들도 있다. 이들은 가혹한 대접과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다. 이들은 통제되지 않으며 늘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들의 탈출은 이따금씩만 성공할 뿐이며, 그때마다 그들 자신이나 남들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권 ‘3장 정신분석의 탄생’(260쪽)에서

그러나 프로이트를 ‘무의식의 발견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사변과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던 시적인 개념인 무의식을 경험과 관찰을 통해 그 기원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만든 최초의 사람이었다.

환상의 파괴자
“나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나 자신의 환상, 그리고 인류의 환상을 파괴하는 데 보낸 사람입니다.”
프로이트는 스스로 ‘환상의 파괴자’, ‘과학적 진실의 충실한 종’이라는 데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늘 가능한 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이제 나의 장점으로 꼽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내 일이 되었습니다.” 19세기 과학적 실증주의의 계승자로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은 “과학의 한 조각이며, 과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즉 그에게 정신분석은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하고 환상을 벗겨내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도 프로이트가 보기엔 환상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간 본성에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프로이트의 오랜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그는 공격성을 근본적 충동으로 보는 것이 인간 본성을 모독하는 낮은 평가라며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대 문화를 비난했다.

프로이트에겐 종교도 인간이 지닌 환상, 그것도 어린아이의 환상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부터 일관되게 전투적인 무신론자로서 신과 종교를 조롱했던 그는 정신분석의 도구로 종교의 가면을 벗기려 했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역을 존중하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신전은 없다고 보았다.” 1927년에 발표한 《환상의 미래》가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종교는 예술이나 윤리와 더불어 인류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에 속하지만, 그 기원은 유아의 심리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 ?특히 아버지 ?의 힘에 대한 느낌, 위험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자연 세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 사람들이 신을 발명하거나 문화가 그들에게 강제하는 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집안에 그런 신을 두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타자나 그 자신의 힘과 마주 한 아이의 공상과 비슷하고, 또 그런 공상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종교는 근본적으로 환상, 아이의 환상이다.
― 2권 ‘11장 문명 속의 불만’(319, 320쪽)에서

저자는 프로이트가 “계몽주의 철학의 현대적 상속자로서 … 과학적 통찰을 이용하여 정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도 과학의 직무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신앙 비판에는 종교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고 퍼뜨려 인류가 종교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희망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문명의 해부학자
“인간은 문명 없이 살 수 없지만, 문명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무기를 들고 사회와 문화, 문명의 뿌리까지 파 들어간 문명의 해부학자였다. 그는 《토템과 터부》(1913)에서 《문명 속의 불만》(1930)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에서 종교와 도덕과 문화의 기원을 탐구했다.

내 판단으로는,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다른 누구보다 분명하게, 또 더 공정하게 보았다. 그는 인간, 모든 인간이 문명의 딜레마와 직면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문명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개인이 충동을 통제하고, 소망을 부정하고, 욕정을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 환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프로이트의 지혜로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문명이 부과하는 속박 없이 살 수 없지만, 그런 속박 안에서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 수도 없다. 좌절과 불행은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과되는 측면이 그 금지하는 면이다. 교육은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 요청하지 말아야 할 것, 심지어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며, 이런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절대 인기 있는 예언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 1권 <머리말>(10쪽)

프로이트가 보기에 계약으로 출현한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강렬한 욕망을 매우 철저하게 간섭하고 제어하는 바탕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이로 인한 불만이 언제든 표출될 수 있고 사회는 이런 불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억압하는 개인의 강렬한 욕망과 욕구는 계속 무의식에서 곪으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길을 찾게 된다. 인간이 자신이 만든 사회, 문화 안에서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프로이트에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19세기 빈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적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서 히스테리와 신경증이 자주 발병한다는 사실을 임상 경험으로 확인했고, 그것은 더 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자 문명의 딜레마로 연결되는 통찰이었다.

프로이트적인 인간은 무의식적 요구에 시달리고, 치유 불가능한 양가적 태도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사랑과 증오를 드러내고, 외적인 제약과 내밀한 죄책감 때문에 간신히 제어되는 인간이다. 사회 제도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살인, 강간, 근친상간을 막는 댐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문명 이론은 사회 속의 삶을 강요된 타협이자, 본질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곤경으로 본다.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자체가 불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나아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기대만 하고 살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 2권 ‘11장 문명 속의 불만’(348쪽)에서

카를 융, 정신분석의 황태자에서 냉랭한 적이 되다
―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정치’

이 책은 프로이트의 연구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빈에서 시작해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유럽 곳곳에 만들어지는 정신분석협회와 관련 기관들의 중심으로서 프로이트가 보인 냉철하고 노련한 조직가, 정치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자신과 동일시했던 정신분석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꾸준히 지지자들을 모으고, 정신분석 기관과 정기간행물을 관리하고, 운동 내부에서 갈등하는 세력들을 조정하며 자신의 계획을 추진한 일련의 활동들을 ‘정신분석 정치’라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신분석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던 카를 구스타프 융과 프로이트가 파국을 맞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1902년 가을부터 매주 수요일 밤 소수의 의사들과 일반인이 프로이트의 집에 모여 정신분석에 관해 배우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모임은 ‘수요심리학회’로 자리를 잡는다. 초기 수요심리학회 회원으로는 빈의 의사였던 빌헬름 슈테켈, 알프레트 아들러, 막스 카하네, 루돌프 라이틀러 등이 있었다. 수요심리학회의 방문객은 계속 늘어나서 취리히와 베를린, 헝가리, 미국, 영국 등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를 만나러 왔다. 특히 베를린에서 온 카를 아브라함, 런던에서 온 어니스트 존스, 부다페스트에서 온 산도르 페렌치 등은 이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영향력 있는 외국인들을 더 많이 휘하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빈의 분석가들은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 프로이트는 세상이 정신분석을 “유대인의 학문”이라고 인식하는 한, 이 전복적 사상이 감당해야 하는 짐이 늘어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외국의 지지자들은 매우 중요했다. 1908년 수요심리학회가 빈 정신분석협회로 거듭나고 1910년에는 국제정신분석협회가 설립되면서 정신분석 운동은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때 빈의 지지자들을 물리치고 취리히에서 온 카를 구스타프 융이 국제정신분석협회의 종신 회장으로 선출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프로이트의 결정이었다. 이 일로 알프레트 아들러가 중심이었던 빈 정신분석협회는 불만이 커졌고 결국 아들러가 협회를 탈퇴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행동했다.

프로이트는 1910년 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가 대회와 그 직후에 처음으로 아들러나 그의 동맹자들과 심각하게 맞섰다. 이때 프로이트는 원대한 소망에 따라 정신분석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훗날 자신이 상처를 준 자아들을 달래려고 노력한 것 역시 정치적이었다. 이런 노력은 전투적인 모습과 구별되는 프로이트의 외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1권 ‘5장 정신분석 정치학’(417~418쪽)에서

아들러의 탈퇴로 정신분석 진영 내의 갈등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더 크고 충격적인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프로이트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융의 반란이었다. 스위스 출신의 젊고 야심만만한 정신의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1906년부터 프로이트와 친분을 쌓고 정신분석의 신봉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융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신임했다. 그는 융이 유대인이 아니고, 빈 출신이 아니며, 젊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의 미래를 맡길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융은 융대로 프로이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무조건적인 존경”을 고백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융은 계속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프로이트라는 개인에 대한 “그보다 못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존경”을 고백했다. 융은 이런 “존경”이 “‘종교적’인 열광이 가득한” 특징임을 인정했으며, 이런 특징이 “그 부정할 수 없는 성적 저류(低流) 때문에 역겹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융은 일단 고백의 길로 들어서자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 …… 프로이트는 “나는 숭배의 대상에 어울리지 않다.”고 융을 설득하려 했다. ― 1권 ‘5장 정신분석 정치학’(393쪽)에서

그러나 융이 말한 것처럼 “창조자와 나란히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운명”이었다. 융의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은 엄격한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였던 프로이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 정의를 비롯해 정신분석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는 성적인 충동을 의미했는데, 융은 리비도의 의미를 넓혀 일반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안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융이 자신만의 독창적 이론을 만들면서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융은 1913년 런던 정신의학회 강연에서 자신의 수정된 학설을 처음으로 ‘분석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프로이트는 늘 정신분석 운동 내부에서 이론과 기법을 둘러싼 견해들이 서로 충돌하고 분석가들이 각자 독창성을 발휘할 기회를 갖도록 장려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는 일이었다. 유아 성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핵심 이론을 거부하는 것은 곧 정신분석의 이단이었다. 결국 융과 프로이트는 서로 격렬한 정신분석 공격을 퍼부으며 파국을 맞는다.

“몇 가지 진지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도 교수님에 대한 저의 의심은 인정합니다만, 이 상황을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품위 있는 방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그것을 의심하신다면, 그것은 교수님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을 마치 환자처럼 대하시는 교수님의 기법은 큰 실수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노예 같은 아들 아니면 무례한 악당(아들러, 슈테켈을 비롯하여 지금 빈에서 뽐내고 있는 무례한 무리)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는 교수님의 책략을 꿰뚫어볼 만큼 객관적입니다.” …… “그러는 동안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저 꼭대기에 앉아 계시지요.” 융 자신은 그런 굴종은 못 참겠다고 선언했다. ― 1권 ‘5장 정신분석 정치학’(447~448쪽)에서

1914년 융은 프로이트와의 대립 끝에 국제정신분석협회 회장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의 역사>라는 팸플릿을 써서 정신분석학의 본질적인 원칙들을 밝히고 아들러와 융의 이론이 정신분석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팸플릿은 융과 아들러를 향해 투척한 폭탄이었으며, 정신분석의 충성파들을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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