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번역청이 없는 국가가 있다?
지난 2018.2.7. 청와대 누리집 게시판에 올라와 있던 한 국민청원이 한달 동안의 기한을 맞아 종료됐다.
펌글)
번역을 시장에 맡길 수 없다는 게 청원의 요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전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우리 말글로 옮기는 것은 도로, 항만, 철도,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과 같은 것이며, 이를 시장에 맡겨둬선 안 되니 나라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지원해야 한다는 게 박 교수의 핵심 주장이다.
철학자 김재인 박사는 10년을 들여 2014년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번역 출간했다. 그런데 고작 330만 원 받았다. 언어 능력은 물론이고 고도의 학문적 역량을 지닌 최고 전문가의 10년 노고 대가가 이렇다.
극소수 뜻 있는 학자들의 '열정 페이' 또는 전문 번역가의 노동력 착취, 이 두 케이스 아니면 책이 나올 수 없는 실정이다. 날림 번역이 빈번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계를 위해 번역가들은 질보다 양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우수한 번역 인재들이 버티지 못하고 이 바닥을 떠난다.
번역을 이 시장에 계속 맡기면 우리의 모국어 콘텐츠는 폭삭 망할 수밖에 없다. 지식이 부실한 한국 사회는 미래가 어둡다. 번역을 도로, 항만, 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간주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현 번역 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체부, 관광공사, 문화재청, 지자체 등 각자 필요한 자료를 따로따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복 번역이 되어 예산이 낭비되고 번역 결과물도 중구난방이다. 한미 FTA 협정문 오류 사례를 보듯 지금까지도 번역 수준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공공 번역 작업을 관장하는 공무원은 비전문가이고 순환보직인 데다가 번역이 잘 됐는지 판단할 수도 없다. 훌륭한 번역사 풀(Pool) 또한 전무하다. 따라서 중복 번역 방지, 번역 수준 관리, 공공 번역물 DB화 등을 위한 번역청이 절실하다.
통번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이문화간 의사소통이다. 모든 분야에서 통번역이 필요하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이문화간 의사소통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정부에서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번역청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다만, '청'이 붙었다고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해선 안 된다. 정부, 학계, 업계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
번역청의 역할은 무엇인가.
<1> 행정직, 실무번역직, 기구지원직 등으로 구성해 전문 번역사를 선발하고 업무를 분장하고 결과물을 평가 관리한다.
<2> 전문 DB팀에서 번역 실무에 앞서 문서의 전처리/후처리 작업과 함께 번역에 필요한 전문용어 DB 제공 및 용어 업데이트를 맡는다.
<3> 기구지원팀에서는 정부기관 내 번역 수요를 접수해 배당 처리하고 결과물을 전달하는 한편 사후 불만이나 애프터서비스 처리 등을 관장한다.
주의할 것은 번역청은 민간 번역이 아닌 정부 예산으로 집행되는 번역, 즉 국가 경쟁력과 관계 있는 공공 번역*의 영역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공공 번역: 공공 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국가공공기관의 직간접적인 예산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번역으로, 그 결과물을 공공기관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 공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번역. [출처: 정호정·임현경 <공공번역 표준화의 모델>(한국문화사)]
(중략)
1998년부터 한국연구재단에서 동서양 명저 번역 지원사업이 수행되고 있다. 2015년 1월을 기준으로 396종 696권의 고전이 번역됐다. 일단 이 사업을 확대 보완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예산이다. 2006년에 17억, 2011년 24억까지 지원되던 예산이 2012년부터 10억으로 반토막 났다.
예산이 넉넉해지면 외국어 해독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을 위한 해외 기술문서 번역 분과를 만들 수 있다. 통역 분과, 외교문서 번역 분과 등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의 지적 풍토가 자주성이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양의 동양학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 동양 고전이 자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경우 고전 텍스트 번역 작업을 최우선시 한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중국학과 한국학 전공의 석사·박사 학위논문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국내 학계는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직후 정부에서 '번역국'을 설치해 단기간에 서양 학술서 수만 권을 번역했다. 보수주의의 경전에 해당하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은 일본에서는 1881년에 번역됐다. 그런데 한국은 이보다 128년 늦은 2009년에서야 이 책을 번역했다. 일본이 19세기에 번역한 서양 고전 중 아직도 번역 안 된 책이 허다하다.
일본 학계에서 '사회과학의 천황'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번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일본인 노벨상 수상 이력을 보듯 일본어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한국어는 학문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언어다. 번역청 설립 주장은 한국어를 학문이 가능한 언어로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번역은 한 나라의 학문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어서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글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가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다. 어림도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글의 콘텐츠가 턱없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이란 무엇일까. 모국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일본이 부럽지 않은가. 요즘 젊은 세대의 영어 실력이 좋아졌으니 영어로 읽고 쓰면 되지 않느냐고? 제아무리 영어 도사들이 많이 출현해도 그들이 '우리말'로 그들의 학식을 표현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우리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일본 사회과학의 텐노(天皇)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는데 번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일본은 이 작업을 정부 주도로 수행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ㆍ1868년) 직후 번역국(飜譯局)이란 국가기관을 설치해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들의 번역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세기에 이미 서양의 주요 고전들이 대부분 번역됐다. 우리는 일본에 비해 100년 이상을 뒤졌다. 우리 번역사에는 '잃어버린 100년'이 가로놓여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은 인문학의 뿌리다. 다 죽어가는 우리 인문학을 소생시키는 근원적 처방이자, 지식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다. 이를 입증할 역사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런 국가기관을 일본만 운영한 것도 아니다. 유럽연합(EU) 번역총국(Directorate-General for Translation), 캐나다 번역국(Translation Bureau) 등의 사례도 있다. 굳이 번역청 명칭을 고집할 것도 없다. 번역원, 번역국, 번역위원회 등도 좋다.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를 뿌리부터 살려낼 수 있는 획기적 처방이다. 누가 번역청 설립 공약을 선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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