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랜드 -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의 임상 기록 (폴 브록스, 2009)

시나리오/심리학|2022. 11. 7. 03:00

책소개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 폴 브록스는 여러 해 동안 신경심리학자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신경학 이야기, 형이상학적 우화, 자전적 명상 등이 뒤섞인 아름답고 독특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그는 신경장애에 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 환자들의 기이한 상황은 우연한 운명, 동정의 힘, 역경에 맞서는 인간의 적응력 등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 책은 환자 1인칭 시점에서 이상행동의 증세를 묘사하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그 밑을 받치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도 함께 설명한다. 먼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문장의 주어는 나(I)이다. 그래서 “I am happy”라고 쓸 수 있다. 그런데 “He is happy”라고 쓰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그의 행복한 상태를 그 사람처럼 생생하게 알 수 있을까? 저자는 모든 3인칭 문장의 앞에는 “I think”라는 주절이 들어 있다고 본다. 지구가 자전한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 등의 문장도 실은 그 앞에 나는 생각한다가 붙어 있는데, 편의상 생략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폴 브록스는 이처럼 나(I)의 입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환자의 용태를 설명할 때에도 그의 입장에 서려고 애쓴다.

그런데 “I think”는 세상의 객관적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환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의 뇌가 투명하게 보인다거나, 내 몸의 피가 밤사이 다 없어졌다는 얘기는 환자의 생각 속에서는 현실성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부조리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폴 브록스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실은 누구나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점에서 “I think”의 I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스토리이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일관된 (꾸며낸 혹은 꾸며내지 않은) 스토리가 곧 그 사람의 자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말하는 내(자아)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만들어낸다.


목차
역자의 말

제1부 어둠을 삼키기
서로 다른 인생들:마이클.스튜어트.마틴.엘리.오그레이디 부인
얼굴 뒤의 공간
해마와 편도
태양의 칼
뇌 속에는 영혼이 있는가:강의실에서의 질문
수술실에서:영혼은 없다
런던 거리 지도
내게 거울을 가져와 봐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남자

제2부 돌들이 일으키는 불꽃
자꾸만 내가 죽은 사람처럼 느껴져:코타르 증후군
내뱉은 침과 보드카
바디 아트
아인슈타인 뇌 이야기
신조
이리로 오세요, 인어가 미소지으며 내게 말했다

제3부 물도 없고 달도 없는 땅
유령나무.1
유령나무.2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꿈
절반쯤 돌아온 부두교 아이
배링턴 씨의 곤경
어둠에서 빛이 나온다
텔레포테이션과 복제인간:복제인간 둘이 되느냐, 아니면 내가 죽느냐
갈매기들

더 읽을 만한 책들
감사의 말
추천사 자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신선한 충격 김종길(신경정신과 전문의)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심오한 통찰과 독창적인 생각거리들로 가득한 책
“우리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인지 기구에 대하여 브록스는 아름다운 책을 써냈다. 두뇌의 쭈글쭈글한 표면, 뉴런의 네트워크, 그 심층의 공간 등을 매우 통찰력 깊게 써내고 있어, 이러한 저술 활동만으로도 뇌의 창조적 기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로렌 슬레이터

알렉산드르 루리야, 올리버 색스, 그리고 폴 브록스
『사일런트 랜드』는 탁월한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을 알린다. 폴 브록스는 여러 해 동안 신경심리학자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신경학 이야기, 형이상학적 우화, 자전적 명상 등이 뒤섞인 아름답고 독특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그는 신경장애에 걸린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 환자들의 기이한 상황은 우연한 운명, 동정의 힘, 역경에 맞서는 인간의 적응력 등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 책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다 읽고 난 뒤에도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인상 깊은 신경심리학 서적이다.

뇌 손상과 신경심리학
사고나 질병 혹은 정신적 충격으로 뇌를 다친 사람들은 이상행동을 보인다. 가령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다든가, 자신의 머릿속에 물고기가 헤엄친다고 생각하든가, 자신의 오장육부가 남한테 투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거나, 딸의 결혼식에 분명 참석했는데도 불참한 느낌이 든다거나, 자신이 죽은 사람처럼 느껴진다거나, 목 아랫부분이 모두 마비되었는데 다음 주말에 암벽등반을 가겠다고 계획하거나, 교통사고로 두 다리와 오른손이 잘려나갔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오른손으로 악수하겠다고 나서거나, 페니스가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발기 상태를 유지한다든가, 자신의 온 몸의 피가 밤사이 다 말라 버렸다거나, 자신의 똥을 자꾸 먹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든가 한다. 이런 사례들을 대중적으로 잘 소개한 사람으로는 러시아의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야와 영국의 신경외과 의사 올리버 색스가 있다.
이 두 학자는 우선 환자의 상태를 먼저 묘사하고 이어 해당 뇌손상 부위를 지적한 다음, 결론에 들어가 의학적인 진단을 내린다. 환자들의 사례는 대부분 기이하고 파격적인 것이어서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두 학자의 책들은 시종 환자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환자 자신이 그런 이상 행동을 할 때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어떤 심정인지, 그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환자의 1인칭 시점은 제외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환자는 환자이고, 의사는 의사일 뿐이다.
폴 브록스의 『사일런트 랜드』는 이러한 전통적 입장에 대하여 파격적으로 벗어나 환자 1인칭 시점에서 이상행동의 증세를 묘사하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그 밑을 받치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도 함께 설명한다. 먼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문장의 주어는 나(I)이다. 그래서 “I am happy”라고 쓸 수 있다. 그런데 “He is happy”라고 쓰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그의 행복한 상태를 그 사람처럼 생생하게 알 수 있을까? 그러면서 모든 3인칭 문장의 앞에는 “I think”라는 주절이 들어 있다고 본다. 지구가 자전한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 등의 문장도 실은 그 앞에 나는 생각한다가 붙어 있는데, 편의상 생략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폴 브록스와 『사일런트 랜드』
폴 브록스는 이처럼 나(I)의 입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환자의 용태를 설명할 때에도 그의 입장에 서려고 애쓴다.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는 단 하루라도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했는데, 브록스도 환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게 거울을 가져와 봐요”나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남자”가 그런 대표적인 글이다. 3인칭과 1인칭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것은 어쩌면 무망해 보이지만, 폴 브록스는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 기법을 가져와 이런 시시포스의 노력을 계속한다. 바로 이 노력을 영국 언론들은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이라고 평가했다. 기존의 3인칭 서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눈으로 병증을 보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이런 시도를 가리켜 “아름다운 구상, 아름다운 집필,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칭찬했는데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평가이다.
그런데 “I think”는 세상의 객관적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환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의 뇌가 투명하게 보인다거나, 내 몸의 피가 밤사이 다 없어졌다는 얘기는 환자의 생각 속에서는 현실성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부조리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폴 브록스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실은 누구나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주장을 펼친다. 우리 인간은 따지고 보면 호모 사피엔스(머리를 쓰는 인간)도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도 아닌 호모 파불라토르(homo fabulator: 이야기를 말하는 인간)라는 것이다. 저자는 정상적인 사람도 밤에 꿈을 꾸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또 각성 중에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같은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현상을 지적한다. “유령나무”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꿈”은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환자든 정상인이든 똑같다. 이 정도의 차이에 대하여 브록스는 이런 사례를 하나 제시하고 있다.
매기와 돈은 부부인데 아내가 뇌손상으로 병을 앓고 있다. 부부는 휴양지에서 외식을 하기 위해 외출을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두 젊은 남자가 거리에서 남편에게 달려들어 격투가 벌어졌다. 남편이 노상강도들과 피 튀기며 격투하는 동안 매기는 그런 살벌한 현장과는 아랑곳없이 온화하게 웃었다. 간신히 노상강도를 제압하고 호텔로 돌아와서도 남편은 여전히 동요된 상태였다. 매기는 남자들이 그저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면서 아주 평온했다. 이어 매기는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속극이 나오고 있었다. 두 여성 인물들 사이에 적대감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이거나 비상한 갈등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안절부절 못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으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소리쳤다. “안 돼, 그러지 마. 제발, 안 돼!”그녀는 얼굴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고 입을 딱 벌릴 정도가 될 때까지 심한 공포를 느꼈다. 피 튀기는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던 매기가 텔레비전 드라마의 사소한 긴장은 생사의 문제인 양 심각하게 반응했다.
매기는 뇌의 한 부분인 편도에 문제가 있는 여성이지만, 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인도 얼마든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진지하게 대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그냥 지나쳐 버리면서도 사소한 일에 격렬하게 분노하는 사례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이러한 행동은 겉에서 보면 엉뚱한 것이지만, 그 사람 개인의 관점으로 보면 일관된 스토리의 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I think”의 I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스토리이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일관된 (꾸며낸 혹은 꾸며내지 않은) 스토리가 곧 그 사람의 자아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을 말하는 내(자아)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만들어낸다. 일찍이 미국의 여류시인 뮤리엘 루카이서는 “이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나”의 이야기적(的)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

뇌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나는 뇌의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뇌의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자아(I)의 처소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두뇌가 자아라는 의식(마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신비로 남게 된다. 이 신비는 폴 브록스가 처음 제기한 것은 아니다. 책의 전편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듯이, 마음-신체의 문제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진지한 철학적 주제였다. 플라톤은 마음(영혼)과 신체가 2원적 구조를 갖고 있고 그래서 영혼은 갑이라는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갑이 사망하면 그의 몸을 빠져나간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이원론이지만 약간 다르게 물질이 영혼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은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수용되었다. 영혼이라는 것은 없고 아예 물질(두뇌)의 작용만 있다고 보는 입장을 유물론이라고 하는데, 대표적 학자는 마르크스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영국의 버클리 주교는 물질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과 그 심적 구성물이 곧 세상의 본 모습이라는 주장을 폈다(관념론). 모든 심리적 사건에는 그에 대응하는 물질적 사건이 있다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주장했다(심신평행설). 폴 브록스는 두뇌, 마음, 자아의 관계에 대해서 환자들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며 탐구하는데, 컴퓨터의 비유를 가져와 두뇌를 하드웨어, 마음을 소프트웨어, 자아를 모니터 위의 텍스트라고 생각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폴 브록스의 『사일런트 랜드』는 환자들의 사례를 충분히 인용하되, 새로운 시각으로 그것을 관찰하면서, 환자의 입장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점이 훌륭하다. 영국과 미국 평론가들은 저자가 아름다운 산문을 구사한다고 평가했는데, “태양의 칼”, “갈매기들” 같은 글은 기억과 감정, 환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의사의 입장 등이 잘 종합되어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이 책은 뇌 손상 환자들의 이상행동, 자아, 의식, 마음, 마음-신체의 문제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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