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들의 시대 - 에도시대 300년, 일본은 어떻게 경제번영의 초석을 마련했는가? (와키모토 유이치, 2008)

책소개
중세의 막을 내리고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꽃피웠던 에도시대. 책은 그간 베일에 가렸던 에도시대 경제시스템의 성립과 변천과정을 낱낱이 조망한다. 1년 6개월에 걸쳐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기행 쇄국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장기 연재한 칼럼을 토대로 하여 완전히 새로 쓴 것으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던 선진경제사회 에도를 심층분석하고 있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회 중 하나였다. 그 번영을 낳은 것은 강렬한 벤처정신을 가진 상인들이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에 자급자족에 의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여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비단, 무명, 설탕, 약재와 같은 국제상품의 자급자족은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 생명공학, 정보기술의 국제화라고 할 수 있다.

천하인과 서로 싸우는 하카타의 거상 시마이, 오사카를 '천하의 살림'으로 키워낸 일본 제일의 거상 요도야, 전국에 '작은 교토'를 만든 오노들의 오우미 상인, 해운물류혁명의 중심 인물 가와무라 즈이켄 등 책은 거상들의 발자취를 전국에 걸쳐 더듬어보고, 에도기의 경제시스템의 성립과 변동에 대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통해 쉽게 알려주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 경제 번영의 초석을 마련한 에도시대
제1장 일본인과 ‘바다의 유전자’
제2장 천하의 경제도읍오사카 구축
제3장 상인의 시대와 3대 메갈로폴리스
제4장 움직이는 종합상사 기타마에 선
제5장 겐로쿠 버블과 대중소비사회의 도래
제6장 에도시대의 산업혁명
제7장 에도시대의 리스트럭처링
에필로그 | 에도 광역경제권의 형성과 개국
감사의 글
에도시대 연표
옮기고 나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에도시대 300년, 일본은 어떻게 경제번영의 초석을 마련했는가?
일본 역사에서 에도시대(1603년~1868년, 선조 36년~고종 5년)는 중세의 막을 내리고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꽃피웠던 의미 있는 시기였다. 18세기에 에도(지금의 도쿄)는 이미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도시였다. 당시 세계 주요 도시의 인구를 보면 대략 런던이 86만, 파리가 54만, 베이징이 50만, 우리의 한양이 30만 명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기능에 걸맞은 3대 거점도시를 건설했다. 에도는 ‘정치도읍’이라는 이름의 최대 소비도시였고, 교토는 직물?염색?장식 등 높은 수준의 전통기술을 자랑하는 ‘공업도읍’이었으며, 오사카는 단 하나뿐인 중앙시장으로서 전국경제에서 줏대잡이로 활약했다.

에도시대에 상인들은 쌀을 매개로 한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를 운영(1730년)했고 지금의 은행에 해당하는 환금융을 시작했다. 리스크를 무릅쓰면서 운하를 굴착하고 뉴타운을 조성했다. 농기구 등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으며 해운시대의 막을 열었던 벤처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와 같이 에도시대에 전국 규모의 상품경제가 성립하여 여러 곳에 확산되었던 것은 상인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에도막부가 쇄국체제와 모진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30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했던 사실 때문에 에도시대는 왠지 ‘정치시대’라고 여기겠지만, 실제로는 실물경제 시스템뿐만 아니라 신기전 개간, 해운과 선운 같은 수상교통 등 많은 분야에서 민간의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더욱 더 많이 투입된 ‘민간 활력의 시대’였다.

이 책은 일본 전국을 손수 돌면서 조선이 전해준 문물과 에도시대 거상들이 남긴 발자취를 집대성한 최고의 걸작이다. 그 동안 베일에 가렸던 에도시대 경제시스템의 성립과 변천과정을 처음으로 낱낱이 공개했다.

에도시대를 집대성한 최고의 수작
이 책은 에도시대를 경제적 관점, 즉 에도시대 경제시스템의 성립과 변천과정을 처음으로 낱낱이 조망한 책이다. 에도시대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쇼군)이 되어 에도(도쿄)에 막부를 연 때부터 1868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때까지의 시기다. 봉건사회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며,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지배했던 시기다.

우리에게 일본의 에도시대는 막연히 무사들이 지배한 막부(幕府)체제로 알려졌다. 하지만 에도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막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집권체제가 아니었다. 300여 개 되는 영지가 자립한 분권국가였다. 에도시대에는 화폐를 매개로 하여 오늘날과 똑같은 시장경제가 발달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소비사회가 형성되었다. 메이지시대 이후 이룩한 일본의 근대화는 에도시대에 축적되었던 역량, 특히 민간의 능력, 그리고 조선으로부터 전수받은 문물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이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쇄국체제를 구축한 상태에서 다른 나라에 전혀 기대지 않고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모두 스스로 이룩한 독창성에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신문기자 출신인 저자가, 1년 6개월에 걸쳐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에 연재했던 <기행 쇄국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장기 연재한 칼럼을 토대로 하여 완전히 새로 쓴 것이다. 특히 에도시대에 발달했던 화폐경제 또는 신용경제 등 전기자본주의사회라고 해야 할 시대의 근대성을 밝히기 위해 상품경제가 확산되었던 무로마치시대 전기(1338년~1416년)부터 전국시대(1493년~1573년), 근세의 빗장을 열고자 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던 쇼쿠호시대(아즈치?모모야마시대, 1573년~1603년)까지 언급했다. 내용도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 사회, 문화, 나아가 문학에까지 언급한 심도 있고 부피 있는 책이다. 게다가 저자는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고증과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 책을 썼다.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일본 오사카부터 홋카이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풍요로운 국가' 건설
에도시대는 후진적인 경제사회가 아니었고, 당시 국제 수준에 비추어보면 선진적인 경제사회였다. 그때의 국제사회에 눈을 돌려 쇄국체제를 세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일본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은 17~18세기 국제사회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선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문명권’을 마주 대하면서 동서의 변두리에 있었던 일본과 서유럽이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은 문명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에도막부를 개설한 때(1603년)부터 겐로쿠시대(1688년~1704년)까지 얼추 100년 동안에 인구는 2배가량 늘어났다. 이와 같이 인구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총생산(GDP)이 매우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은 비약적인 생산성 증가였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정신은 의식주 모든 분야에 미쳤다. 즉, 농기구를 혁신하기 위해 골풀무제철 기술을 사용하여 철을 생산했으며, 어망은 삼베로 만들었고, 해운을 지탱했던 재래식 목조선의 돛은 무명으로 만들었다. 등유는 채소 씨앗과 면화씨 기름으로 만들었으며, 등불의 초는 거먕옻나무로 만들었다. 옷은 면화농사와 누에치기를 하여 뽑아낸 면직물과 비단으로 만들었고, 염료는 쪽과 잇꽃으로 만들었으며, 책과 장부류는 닥나무와 삼지닥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거름은 정어리깻묵(기름을 짜고 남은 깨의 찌꺼기)과 청어깻묵으로 만들었고, 돗자리는 골풀로 만들었으며, 약재는 조선과 일본의 재료로 만들었다. 철강?섬유?화학?제약?제지?석유와 같은 주된 공업 분야 대부분을 농업이 꾸려나갔던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원료 확보와 생산에 그치지 않고 상품의 유통?판매부터 금융시스템까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두 스스로 처리했다. 현금(은, silver) 결제를 할 필요가 없었던 원격지 송금환 개발은 상품유통을 활발하게 함과 더불어 신용경제를 확실하게 이룩하게 했다.

고노이케와 미쓰이 등 거상들은 환금융(환전상)을 통해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시장에 보부상경제를 구축하고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요컨대 오늘날이라면 국제금융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람들이었다. 오사카 상인들이 생각해낸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 ‘도지마(오사카 북구의 지명) 쌀시장’은 쌀값의 시세를 정하는 표준시장이 되는 한편, 자금조달을 하는 곳으로서 막부와 영지의 경제에 반드시 필요한 금융시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에도시대 거상들로부터 배우는 비즈니스 마인드와 벤처정신
에도시대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회 중 하나였다. 그 번영을 낳은 것은 강렬한 벤처정신을 가진 상인들이었고, 시대적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쇄국이었다. 쇄국은 해양국가 일본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억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나긴 태평성대와 번영을 누리게 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으며 자급자족에 의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여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다. 비단?무명?설탕?약재와 같은 국제상품의 자급자족은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생명공학?정보기술의 국제화라고 할 수 있다.

에도시대는 조금도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았다. 민간(상인)이 생산부터 유통?판매?금융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성을 발휘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막부는, 경제활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민간이 알아서 하라’는 듯이 민간 활력에 맡기는 방침으로 일관했다. 해운정책과 금융정책 등 어떤 경제정책을 펼치더라도 개략적인 방침만 정할 뿐, 운용을 포함하여 그 뒷일은 민간에게 모두 맡겼다. 상인들이 규칙을 정하여 스스로 운영한 ‘상인조합’의 발전이 그 좋은 사례였다.

상인들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에도시대를 주도했던 이는 거상들이었다. 막부도 영주도 겉으로는 어쨌든 간에 거상들이 지닌 부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3대 거상이라 일컬었던 고노이케, 미쓰이, 스미토모는 각각 금융자본, 상업자본, 산업자본의 주체로서 국가경제를 짊어졌으며, 그 밖에도 3대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와 각 지역의 성곽도시에는 국가경제와 지역경제에 깊숙이 관여했던 유명?무명의 거상들이 많았다.

그때 커다란 소임을 맡았던 사람들이 사농공상(무사?농민?직인?상인)이라는 신분제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던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경제사회를 움직이는 규칙과 시스템을 스스로 궁리해내어 민간 활력에 의존하는 막부가 통치정책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상인들은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를 운영했고 지금의 은행에 해당하는 환금융(환전)을 시작했다. 리스크를 무릅쓰면서 운하를 굴착하고 뉴타운을 조성했으며 메갈로폴리스 오사카를 건설했다. 농기구 등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으며, 해운시대의 막을 열었던 벤처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영지 안에서 사용하는 번 화폐 발행에도 관여하여 지역경제의 통화 부족을 해결했다. 이와 같이 에도시대에 전국 규모의 상품경제가 성립하여 여러 곳에 확산되었던 것은 상인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천하인과 서로 싸우는 하카타의 거상 시마이, 오사카를 “천하의 살림”으로 키워낸 일본 제일의 거상 요도야, 전국에 “작은 교토”를 만든 오노들의 오우미 상인, 해운물류혁명의 중심 인물 가와무라 즈이켄, 환전상금융으로 경제를 움직인 코우노이케 무네토시와 미츠이 다카토시… 등, 이 책은 거상들의 발자취를 전국에 걸쳐 더듬어보고, 에도기의 경제시스템의 성립과 변동에 대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통해 쉽게 알려주고 있다.

에도시대는 해운과 소비경제의 시대
에도시대는 해운의 시대였다. 해운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자급자족경제는 물론, 오랜 태평성대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남의 나라로 여겼던 홋카이도를 일본 경제에 편입하여 전국 규모의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게 한 것은 동해(EAST SEA) 항로와 세토내해(Seto inland, 일본 혼슈, 규슈, 시코쿠에 둘러싸인 일본의 한려수도. 크고 작은 3,000여 개의 섬이 흩어져 있으며 해상교통의 중요한 교통로, 국립공원으로 지정) 항로를 연결하는 서쪽 항로였다. 에도시대 중기(1691년~1779년)에 태동하여 후기(1780년~1868년)부터 메이지시대(1868년~1912년)에 크게 발전한 벤처비즈니스 ‘기타마에 선(Kitamae ship)’의 활약은 해운이 경제의 대동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홋카이도와 오사카를 시모노세키 경유로 연결한 ‘기타마에 선’을 통해 전국경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쇄국이라는 낱말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약동감 넘치는 세계가 있었다. 그 중 동해 항로는 경제의 대동맥이었다. “천하의 돈 70퍼센트가 오사카에 있다”고 일컬었던 오사카의 번영도 동해 항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아가 동해 항로를 이용하여 홋카이도에까지 광역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역할을 수행했던 주역은 기지와 셈을 겸비한 ‘벤처상인’이라고도 해야 할 기타마에 선 선주들이었다. 반면, 인구 100만 도시인 에도와 ‘천하의 경제도읍’ 오사카를 직접 연결하여 태평양 항로를 빈번하게 왕래했던 것은 ‘히가키 선(Higaki ship)’과 ‘다루 선(Taru ship)’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 열도 주변을 달리는 ‘바닷길’은 산물뿐만 아니라 사람과 문화, 또는 기술을 싣고 지역경제와 사람들의 생활을 떠받쳤다.

결국, 바람과 물살과 기업가정신(entrepreneurs, 기업의 본질인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위해 기업가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나 정신)이 에도시대의 전국경제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에도시대에 대중소비사회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국제상품을 자급자족하는 상품경제의 발자취를 빈틈없이 살펴보면 평화가 오랜 동안 지속된 에도시대에는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사회의 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비경제시대’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에도?오사카?교토라는 ‘3대 메갈로폴리스’였다. 각 영지의 성곽도시경제와 질적으로 다른 전국경제는 ‘3대 메갈로폴리스’가 형성되면서 구축되었다.

18세기 중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세계 최대 도시로 부상했던 에도는 인구의 절반을 무사가 차지하는 거대한 소비도시였다. 교토는 중세 이후 상업도시의 자리를 오사카에게 넘겨주었으며, 그 이후 오직 고급품을 취급하는 최대 공예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오사카는 전국 유통의 핵심이 되는 ‘천하의 경제도읍’이었다. 3대 메갈로폴리스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벌충하면서 에도시대의 경제사회를 구축했다.

에도시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후진적인 사회도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의 문물을 흡수하여 스스로 앞선 시장경제를 창출한 시대정신은 오늘날에도 널리 적용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봉건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에도막부에 의해 이끌려 나간 전제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에 있으면서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이 그대 멈추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메이지시대 초기 제국의회를 개설할 때도 현 의회를 먼저 발족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영지마다 독립한 분권국가였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에도시대는 상거래와 경영기법뿐만 아니라 사상과 학문, 또는 예술?문화, 도시건설 등에 있어 상인들의 슬기와 능력이 마음껏 발휘되었다. 그런 뜻에서 민간 활력이 가장 빛을 발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역사를 배우고 역사의 가르침을 받아 ‘현재’를 확인해야 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에도시대의 경제사회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일본은 오직 서양을 열심히 쫓아간 결과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길도 거품경제가 붕괴하자 비로소 에도시대를 다시 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때까지의 서양모델을 대신할 새로운 방향이 필요해졌을 때, 바꿔 말하자면 메이지유신 이후 줄곧 일본이 지닌 서양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겨우 자기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시사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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