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와 패미컴 (NES)

시나리오/게임기획|2019. 11. 3. 03:30

일본 교토에 위치한 닌텐도 사옥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 붙여 큰 성공을 거둔 일화는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어찌보면 야마우치 히로시는 스티브 잡스보다도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야마우치 히로시는 디즈니 캐릭터를 이용해서 카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의 카드는 단순히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디즈니의 인기 있는 캐릭터를 넣으면 

사람들이 갖고 싶고 보관하고 싶은 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아이디어는 일본 시장에도 그대로 적중해서 

디즈니 카드는 무려 60만 개에 이르는 판매량을 기록한다. 

디즈니 카드의 대 히트 이후 닌텐도(Nintendo, 任天堂)는 명실공히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로 거듭난다.

디즈니의 캐릭터를 이용한 카드의 성공을 바탕으로 

닌텐도는 1962년 주식 시장에 상장되고 야마우치 히로시는 대규모의 자금을 공급받게 된다. 

이에 고무된 그는 오래 전부터 소망하고 있던 닌텐도의 사업다각화를 위해 다양한 업종에 뛰어든다. 

그는 시대가 갈수록 빠른 것을 원한다고 판단해서 인스턴트 식품업에 뛰어들지만 곧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다. 

그 후 일본 전체의 풍요로운 산업 발전으로 레저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택시와 같은 운수업과 호텔 같은 숙박업 등에도 진출하지만 새롭게 시도한 사업 모두 줄줄이 망하고 만다. 

이 결과로 

한때 980엔에 이를 정도로 유망한 주식 종목 중 하나였던 닌텐도의 주가는 20엔까지 급락하게 된다. 

이때 야마우치 히로시는 마지막 시도라는 심정으로 

닌텐도가 놀이를 제공하는 카드 회사인 만큼 장난감을 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마침 공장 직원 중 한명이 손수 만든 장난감으로 재미 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장난감을 보는 순간 야마우치 히로서는 직관적으로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장난감을 상품으로 개발하라고 직원에게 지시를 하고 

판매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1962년에 발매된 이 장난감의 이름은 울트라 핸드로 

600엔의 가격에 발매 되어서 무려 140만 개라는 경이로운 판매량을 기록한다. 

이러한 놀라운 히트 재정적으로 수렁 속에 빠진 닌텐도의 어려움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울트라핸드' 닌텐도 1966년 출시

 

울트라 핸드를 발명한 직원은 요코이 군페이였는데 

그는 수공업으로 이루어지던 카드 생산을 

기계를 이용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위해 고용한 기술자였다. 

원래 닌텐도의 직원은 대학 졸업자가 별로 없었지만 

요코이 군페이는 회사의 공장 자동화를 위해 회사에서 뽑은 몇몇의 고학력자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야마우치 히로시가 고학력의 고급인력들을 사원으로 뽑겠다고 할때만 해도 사내의 반발이 심했다. 

카드회사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하지만 야마우치 히로시는 지금 당장보다는 미래를 위해서 고급인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코이 군페이 역시 야마우치 히로시의 고급인재 전략 덕분에 입사한 사원이었다. 

울트라 핸드의 히트 이후 야마우치 히로시는 

요코이 군페이를 공장의 자동화 시스템 개보수 관련 업무 담당자에서 

장난감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닌텐도 전 CEO 야마우치 히로시 (1927 ~ 2013)

 

 

한편 야마우치 히로시는 

장난감 울트라 핸드의 성공덕분에 생겨난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시 여러 업종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육아용품을 만들고 사무기기 등의 문구업까지 손을 대지만 

야마우치 히로시는 또 다시 크게 실패하고 만다. 

이 무렵 야마우치 히로시는 

다른 사람이 먼저 시작한 사업을 따라해 봐야 결국 남에게 뒤쳐질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래서 남을 따라가기 보다 남들이 해보지 못한 독창적인 것을 추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마침 울트라 핸드를 개발한 요코이 군페이가 이번에는 전자기술에 장난감을 접목한 광선총을 개발한다.  

광선총은 일본에서 사회현상으로 불릴 만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덕분에 닌텐도는 일본 최고의 완구업체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을 통해서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의 발전 방향을 전자기술과 놀이의 결합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관련 업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서 

크리스마스 성수기의 판매량을 높게 잡고 미리 많은 장난감을 대량 생산해 놓지만 

때마침 터진 오일 쇼크 때문에 회사는 다시 어려움에 빠진다. 

닌텐도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도 힘들어졌고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외부에서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1972년에 세계최초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마그나복스의 오딧세이가 등장하는데 

이를 본 야마우치 히로시는 그 어려운 재정 상황에서도 전자오락 분야에 진출한다.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닌텐도의 미래라고 생각한 그는 

새로운 대졸 신입사원들을 받아들여 게임 개발에 매진하게 한다. 

1975년에 닌텐도는 마그나 복스의 오딧세이를 일본에서 직접 유통한다. 

또한 닌텐도는 일본의 대표 전자업체인 미츠비시와의 합작으로 

가정용 게임기인 GAME 6와 GAME 9을 자체 개발한다. 

GAME 6는 게임기에 여섯 개의 게임이 들어가고 

GAME 9는 9개의 게임이 들어있는 게임기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닌텐도는 이제 언제 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때 또 다시 등장해서 닌텐도의 위기를 구해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요코이 군페이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철도인 신칸선을 타고 가다가

어느 회사원이 휴대용 전자계산기를 들고 심심풀이로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휴대용 게임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요코이 군페이의 아이디어를 들은 야마우치 히로시는 

샤프전자와 협력해서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하도록 지시한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게임워치이다. 

 

1980년에 첫 출시된 '게임 & 워치(Game & Watch)

 

 

일본의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을 다니기 때문에 이동시간이 많고 

그래서 다른 나라 또래들에 비해 자투리 시간이 많다.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는 

자투리 시간을 무의미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이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시켜주었다. 

일본에서는 버스와 전철에서 게임워치를 즐기는 많은사람들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처음 게임워치를 발매하려고 할때만해도 주위에서는

12800엔이나 되는 장난감을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야마우치 히로시를 비웃을 정도였지만 

게임워치의 성공은 매우 놀라웠다. 

게임워치 성공 덕분에 무너져가던 닌텐도가 회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게임 워치 발매전에 닌텐도의 빚이 무려 80억 엔에 이를 정도였지만 

게임워치의 극적인 성공으로 단숨에 회사의 모든 빚을 갚고 

40억 엔에 이르는 자금을 은행에 저금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워치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마침 닌텐도의 업소용 게임 사업부에서 개발한 동키콩이 미국에서 히트해서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한다. 

동키콩의 성공으로 닌텐도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명기업으로 통하게 되는데 

동키콩의 게임 기획자가 오늘 날 게임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미야모토 시게루이다. 

 

 

 

하드웨어 기술이 뛰어난 요코이 군페이와 

게임 소프트웨어의 디자인이 뛰어난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양 날개를 단 야마우치 히로시는 

더 과감한 선택을 한다.

그것은 바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으로의 진출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아타리 쇼크라고 해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 붕괴되고 있을 무렵으로

한때 유행한 디스코나 롤러스케이트처럼 게임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질 무렵이었다.

이와 같이

암울한 시장 상황과 주위의 비난과 비아냥 속에 개발된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패미컴이

미국시장에 발매하게 되는데..

패미컴 (NES, 1983)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게임 시장을 장악한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컴퓨터가 각광받자 급속도로 붕괴되는 산업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었다. 

사실 컴퓨터와 가정용 게임기는 같은 기술로 시작한 쌍둥이와도 같고 동시에 라이벌이기도 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이미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VCS 2600가 2천만 대 넘게 판매되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당시 가정용 컴퓨터의 마케팅 포인트는 

우선 게임을 할 수 있으며 그밖에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만능 기계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가정용 게임기의 보완재이자 대체재로써 컴퓨터를 강조하여 초기의 컴퓨터 보급을 이끌었는데 

마침 컴퓨터 과목이 정식으로 학교의 교과 과목으로 채택됐을 때 

컴퓨터 회사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실행한다. 

 

게임기는 아이의 학업을 망치지만 컴퓨터는 아이를 대학에 보내준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캠페인은 놀라운 파괴력을 발휘해 실질적인 경제권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집에 있는 게임기를 버리고 새롭게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컴퓨터의 보급이 늘어가면 갈수록 놀랍게도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붕괴되었고 

결국 가정용 게임기 시장 자체가 증발되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붕괴를 뜻하는 아타리 쇼크 후에 등장한 닌텐도의 문제는 

당시 게임에 부정적이었던 여론들이었다. 

실제로 처음 닌텐도가 미국 시장에 진출할 당시 언론들은 

미국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느 일본의 무식한 기업가가 

미국에 게임기를 들고 나왔다고 비아냥 거렸다. 

당시 미국에서는 게임이란 이미 철이 지나도 한 참 지난 유행 같은 것이었다. 

롤러 스케이트장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다가 사라졌듯이 

미국에서는 게임은 그런 대접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닌텐도의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 붕괴의 원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수준이 떨어지는 게임들이 무분별하게 시장에 쏟아져 나온 것이 문제라고 봤다. 

시장에서 질이 낮은 게임을 구매한 고객들이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에 실망하고 

그 다음에는 게임을 아예 구매하지 않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검증받은 양질의 게임 콘텐츠만을 제공하면 

충분히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바라본 미국 시장은 훨씬 더 심각했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너무 심한 나머지 유통업체에게 가정용 게임기인 패미컴을 소개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아예 닌텐도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판매 책임자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사위였던 아라카와 미노루였는데 

오랫동안 해외에서 근무해봤기 때문에 미국의 그런 현 사정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패미컴이라는 제품명을 NES (Nintendo entertainment)로 바꾸고

여러가지 준비끝에 미국 최고의 전자제품 전시회인 CES에 출품해봤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이미 게임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는지

가정용 게임기를 전시하고 있는 닌텐도의 부스 자체를 방문하지도 않고 외면했다.

이때 아라카와 미노루는 너무나 큰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야마우치 히로시에게

미국 시장에서 철수하고 싶다고 밝힐 정도였다.

하지만 야마우치 히로시는 호통을 치면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500만 달러의 금액을 제시하면서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지시했다.

 

결국 아라카와 미노루는 

패미컴이 가정용 게임기로 시장에 접근하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패미컴이 게임기라는 이미지로부터 탈피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패미컴의 디자인도 새롭게 수정하고 각종 부가 기능을 추가했다. 

또한 패미컴은 그 자체가 패밀리 컴퓨터라는 약자에서 보여 주듯이 

단순히 가정용 게임기가 아니라 컴퓨터의 기능도 고려한 제품이라고 선전했다. 

사용자들은 패밀리 컴퓨터로 베이직 언어를 이용하거나 워드프로세서 작업도 할 수 있었고 

또한 사운드 칩을 내장해 이를 통해 컴퓨터 음악도 구현할 수 있었는데 

아라카와 미노루는 이와 같은 장점을 강조하면서 판촉전을 펼쳤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유통회사로부터 단 한 건의 주문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라카와 미노루는 다시 완구 제품의 이미지로 패미컴을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닌텐도가 일본에서 내놓아 크게 히트한 완구제품인 

로봇 형태의 장난감 R.O.B(Robotic Operating Buddy)를 보너스로 추가해 함께 판매한 것이다.

R.O.B는 말 그대로 로봇 형태의 장난감이었는데

패미컴의 컨트롤러로 각종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었고 이는 많은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또한 재퍼라는 총 모양의 컨트롤러도 함께 추가했는데

이는 총을 쏘는 사냥 게임으로 실제로 체감하는 느낌의 재미를 살린 제품이었다.

아라카와 미노루의 미국 지사는

당시의 기준으로 일반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정용 게임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패미컴을 유통업체에 소개한 덕분에

그나마 완구점을 통해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임시장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미국에서 새롭게 가정용 게임기를 판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애초에 패미컴을 취급해주는 가게는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패미컴의 판매는 계속 지지부진 하였고 결국 닌텐도는 파격적인 유통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닌텐도는 패미컴을 가게에서 전시해주기만 해도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무료로 패미컴의 견본품을 보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만약 가게에 패미컴을 전시할때는 닌텐도 직원들이 직접 찾아가서 패미컴을 설치하였고

가게 전체를 예쁘게 인테리어까지 해주었다. 

또한 패미컴의 재고가 생길 때 100% 환불해주기로 하는 등

유통 상인의 입장에서는 패미컴을 상점에 전시한다고 하면 손해볼것도 없었고 오히려 이익이 더 많았다.

사실 일본에서 패미컴을 유통하는 사람은 무조건 선불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야 했으며

재고는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미국에서의 각종 인센티브는 파격 그 자체로서

시장 개척을 위해 닌텐도가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패미컴이 팔리든 안 팔리든 부담이 없었던 미국의 유통점들은 가게 한 켠에 패미컴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통점을 하나씩 장악하던 중에 마침 미국 최고의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고

이때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고르던 부모들은

가게에 예쁘게 전시되어 있던 장난감으로서의 패미컴이 눈에 띄었는데

이때를 계기로 하여 패미컴 판매에 불이 당겨졌다.

한번 패미컴의 판매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식을줄을 몰랐고

이미 죽었다는 게임시장은 완벽하게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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