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로 유명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어떤 인물인가요?

시나리오/게임기획|2019. 11. 2. 02:30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1) 게임기의 운명을 결정한 게임 기획자 사카구치 히로노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미지의 초원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파이널 판타지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을 전세계에 알린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파이널 판타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드래곤 퀘스트의 인기에 영합한 아류 작이라면서 비난을 하였다.

하지만 실제 게임을 플레이 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로 거듭나게 된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坂口博信)

파이널 판타지는 드래곤 퀘스트와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된다.

드래곤 퀘스트는 기존의 캐릭터와 게임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정통성을 내세우는데 비해서

파이널 판타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드래곤 퀘스트에서의 세계관과 캐릭터가 정해져 있지만

파이널 판타지는 세계관과 캐릭터자체가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래서 파이널 판타지는 그 제목만 똑같을 뿐이지 각 시리즈마다 다른 주인공과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게임계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킬러 소프트의 파워가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1997년이 시작될 때만 해도 32비트 가정용 게임기인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의 게임기 전쟁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팽팽하였다. 

마침 두 게임기는 발매된 지 2년째를 맞아서 나란히 500만개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과연 두 게임기중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뉘었고 

이렇게 치열한 경쟁은 스포츠 경기를 보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게임에 의해서 이 전쟁은 끝나고 만다. 

그것이 바로 파이널 판타지 7이다. 

패밀리와 슈퍼 패미컴으로 등장했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기에

당연히 닌텐도의 게임기로 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파이널 판타지7는 닌텐도의 차세대 게임기인 닌텐도 64로 개발중 이었다.

하지만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최종 책임자인 사카구치는

이제 자신의 스토리 텔링 능력을 더욱 비주얼하게 표현하고 싶어했다.

제작비용에 부담이 큰 롬팩에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은 한정되어 있는 만큼

640MB가 넘는 고용량을 저비용으로 제공할 수 있는 CD-ROM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닌텐도가 차세대 게임기의 저장매체로 롬팩을 사용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자마자

사카구치는 히로노부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게임인 파이널 타지를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발매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97년 1월 31일에 역사적인 파이널 타지 7의 발매가 이루어진다.

2D에서 3D로 변신한 파이널 환타지 7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스토리에 따라서 함께 제공하는 동영상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었다. 

파이널 타지 7의 발매일은 전세계에 새로운 게임 패러다임을 선포하는 날이었다.

이제 2D의 시대는 가고 진정한 3D의 시대가 왔음을 알림과 동시에

새턴은 이제 그 운명을 다했음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파이널 판타지 7의 발매 이후 세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게임기 개발을 시작해야 했다. 

사실상 게임기 시장에서 패배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세가는 파이널 타지 7 발매 이후 불과 1년 10개월 후에 차세대 게임기인 드림캐스트를 발매하고 만다.

그리고 파이널 타지 시리즈에 뒤지지 않는 게임 소프트를 만들기 위해서

세가가 자랑하는 게임 크리에이터인 스즈키 유에게 700억이 넘는 돈을 투자했지만

결국 시장에서 패배하고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전격 철수를 선언하게 된다.

세가에게 있어서 파이널 타지 시리즈는 악몽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킬러 소프트가 게임기 시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세계 게임 마케팅 교과서에서 파이널 타지 7은

컨텐츠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파이널 타지 7은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이 미국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게임이기도 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은

자유도가 떨어져서 미국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선입관을 주었던 장르이다.

게임의 자유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은 단지 정해진 플레이만 해야 하는 어드벤쳐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관을 파이널 타지 7이 깨뜨린 것이었다.

그 기반에는 아름다운 그래픽과 훌륭한 스토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비록 자유도가 떨어지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캐릭터와

화려한 배경 그리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어울어 지면서 새로운 재미를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파이널 타지 7은 미국에서만 무려 2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전세계에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의 최고봉은 바로 파이널 타지 시리즈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일본내에서의 판매량과 인기에서는 드래곤 퀘스트시리즈가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시장에서는 파이널 타지가 더 높은 평가를 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이 아닌 해외에서 드래곤 퀘스트의 크리에이터 호리이 유지는 몰라도

파이널 타지의 크리에이터 사카구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렇듯 치열한 게임기 시장을 종식시켰다는 것과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을 세계에 알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카구치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업적이 제대로 평가를 받아서

그 많고도 쟁쟁한 일본 게임 크리에이터를 모두 제치고

미야모토 시게루 다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당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파이널 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2) 사기로 시작된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게임 인생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1962년 11월 25일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다. 

그가 처음 접한 게임은 12살 때 백화점 옥상에서 했던 퐁이다. 

그리고 그는 동생과 함께 닌텐도의 게임&워치나 장난감 광선총을 가지고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게임은 그에게 하나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이 게임을 개발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직접 스쿨 밴드를 조직해서 많은 곳에 공연을 다닐 정도로 음악에 자신을 불살랐다. 

음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생각으로 음악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스쿨밴드에서 그는 작사, 작곡, 보컬 그리고 일렉트로닉 기타까지 맡은 만능 멀티 플레이어로 팀의 리더였다. 

그는 일본 공중파 방송사가 주관하는 순수 창작 음악 경영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의 꿈은 오직 전문 뮤지션이 되는 것이었고 그에게 공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막상 대학 시험에 떨어지게 되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떨게 된다. 

결국 사카구치는 전격적으로 음악을 포기하고 재수를 선언한다.

재수를 하는 1년 간은 그가 태어나서 했던 공부의 전체양보다 

그 1년 간이 더 많을 정도로 대학 시험 공부에 매진한다. 

그가 대학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대학을 가면 불안하고 막연한 미래가 조금은 더 밝아 질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고향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주인공이 집을 떠나 모험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듯이 

그도 롤플레잉 게임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탐험하고 싶었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지만 확실한 것은 집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도 일부러 집과는 멀리 떨어진 요코하마 대학 전자 공학부를 선택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간 그는 역시 공부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자유로운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밴드 생활에 다시 열심히 빠져들었다. 

하지만 우연히 동급생 친구인 다나카 히로미치 집에서 처음 애플 2 컴퓨터를 보고서 충격을 맛보게 된다. 

특별한 목표가 없었던 그의 인생에 새로운 도전 꺼리가 생긴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재수생활 이후 다시 한번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된다. 

프로그래밍 공부를 집중적으로 시작한 그는 파스칼, C언어, 베이직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해도 프로그래밍 전문가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독학으로 해낼 수 밖에 없었다.

애플2 Apple II

어느 정도 프로그래밍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프로그래밍 기술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5년 봄방학을 맞이하여서 사카구치와 그의 친구인 다나카 히로미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같이 알아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 정보지에서 한눈에 끌리는 광고를 보게 된다.

시급이 무려 1500엔을 준다는 PC방 광고였다.  

당시만해도 일반 아르바이트의 급료는 기껏해야 400엔에서 500엔일 때

1500엔을 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와 다나카 히로미치는 아르바이트 정보지를 보자마자 광고를 낸 PC 방에 달려가서 취업을 지원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정보지의 광고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전형적인 과장광고였다.

광고를 낸 PC 방사장인 미야모토 마사시는

그와 다나카 히로미치를 보자마자 1500엔을 줄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였다.

하지만 PC방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팔면 

충분히 1500엔을 벌 수 있을 것이라면서 완전히 다른 제안을 하였다. 

막상 그 얘기를 들은 그와 다나카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용솟음 치면서 

한번 도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사기라면서 아르바이트를 포기했지만 

그 둘은 아직은 젊었던 시절인지라 미야모토 마사시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 둘은 봄방학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봄방학 동안 그냥 PC방에서 컴퓨터를 마음 데로 쓰면서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이 없었다

파이널 환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3) 계속되는 실패속에 마지막으로 만든 게임 파이널 타지

계속 되는 게임의 실패!

PC 방의 주인인 미야모토 마사시는 스퀘어의 창립자이고 현재 스퀘어 에닉스의 최대 주주로 유명하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다른 사람 보다 먼저 컴퓨터의 가능성을 알아 채고 소프트웨어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그는 개발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PC방 사업을 계획한다. 

당시까지 만해도 애플의 컴퓨터 가격은 80만엔(우리 돈 800만원)이 넘을 정도로 초고가였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였고 

PC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개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프로그래머였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미야모토 마사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스퀘어를 PC방으로 창업해서 개발자들을 모을 생각이었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애초에 PC 방 이용자들의 이용요금으로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PC방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서 실력자를 찾아내어 

함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SQUARE スクウェア

결국 아르바이트 정보지에도 절대로 주지 않을 시급 1500엔으로 광고를 해서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했던 것이다. 

이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확실히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게다가 사카구치는 PC방의 컴퓨터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이유로 스퀘어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그의 의도는 확실히 맞아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스퀘어에 들어온 사카구치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프로그래밍 실력에 확신이 없었고 엄연한 초보였다.

그래서 뛰어난 프로그래밍 능력이 필요한 슈팅이나 액션게임은 포기하고

텍스트 기반의 어드벤쳐 게임을 개발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트랜실바니아라는 어드벤쳐 게임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참고로 해서 게임을 개발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그의 게임은 데쓰 트랩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9800엔이라는 고액으로 게임 판매를 시작하였고

겨우 3천개 정도를 파는데 그친다.

사실상의 실패였다.

그는 다시 데쓰트랙의 후속작 2탄을 개발하고

이번에는 가격을 30%이상 내린 6800엔으로 게임을 팔았다.

이번에는 다행히 적자는 면하게 된다.

이 덕분에 사카구치는 전격적으로 정직원으로 승격되고 개발팀의 팀장이 된다. 

스퀘어는 이와 함께 다른 여러 게임들이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아름다운 그래픽이 강점인 회사로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고수익을 바탕으로 동경 중심부에 사무실을 얻었고 

직원 수는 100명이 넘어갈 정도로 성장을 거듭한다. 

하지만 쉽게 달아오른 불은 쉽게 식는다고 하듯이 스퀘어도 얼마 못 가서 쇠락의 길을 걷고야 만다. 

스퀘어의 게임들이 시장에서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 하게 되자

100명이었던 직원은 어느덧 반 이상을 해고시켜야만 했고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급기야 회사의 사무실도 동경의 변두리로 이전해야마 했다.

사카구치도 킹스나이트, 튀어나와라 대작전, 하이웨이 스타등을 개발했지만

회사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 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연속되는 실패로 이때부터 자신은 게임 개발에 소질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하지만 그냥 게임 계를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뭔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혼을 다 받쳐서 제대로 된 게임 하나를 완성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꿈과 염원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그는 마침 드래곤 퀘스트를 접하게 된것이다.

드래곤 퀘스트는 그에게 처음 애플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깊은 충격을 선사 해준다. 

당시로써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획기적인 그래픽과 감동적인 스토리를 보면서 

그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확실 하게 알 수 있었다.

*사카구치는 드래곤 퀘스트를 보고서 파이널 환타지 제작을 결심한다. 

하지만 드래곤 퀘스트도 울티마를 보고서 충격을 먹고 제작을 시작한 게임이다. 

다만 리차드 게리엇이 개발한 울티마의 복잡함을 없애고 시나리오를 가미한 것이 드래곤 퀘스트이다. 

파이널 타지도 울티마의 영향권에 있다.

사카구치는 울티마의 엔딩을 수십번보면서 게임에 사용된 수치들을 분석했다.

그래서 자신의 파이널 타지에 수치들을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드래곤 퀘스트를 능가할 수 없지만 2등은 할 수 있을꺼야!

그래 스토리가 있는 게임이어야 해! 

그는 자신의 강점은 레이싱이나 액션게임이 아니라 스토리로 감동을 주는 게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으로 만했고 실제로 패밀리 게임기로는 불가능한 것들 것이라고 봤던 것을 

드래곤 퀘스트가 그대로 구현한 것을 보고서 이제 자신이 나아 갈은 확실히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사카구치는 드래곤 퀘스트를 수십 번 반복해서 엔딩을 보면서 게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래곤 퀘스트와 같은 게임을 만들지 못하면 

자신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마지노선까지 그었다. 

그는 후회 없이 게임을 개발해서 드래곤 퀘스트의 뒤를 이어가는 2등이 되어보자고 결심하였다.

처음 파이널 타지 제작이 시작됐을 때 게임 제목은 정하지 않고

영어 약자로 FF라는 프로젝트 이름만 있었다.

개발자들과 의논하면서 타지(Fantasy)세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타지의 F는 꼭 들어가기로 협의가 된 정도였다.

그리고 며칠간의 고민 끝에 사카구치는

이 게임에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해서 파이널(Final)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낸다.

결국 파이널 타지라는 게임 타이틀은

사카구치의 게임개발에 대한 마지막 환상과 꿈을 담았다는 뜻을 가진 게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파이널 판타지는 드래곤 퀘스트를 참고로 하되 

철저한 차별화 전략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롤플레잉 게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게임의 세계관에서부터 스토리 그리고 전투 방식까지 드래곤 퀘스트와 다른 것을 추구했다. 

드래곤 퀘스트의 아류 작이라고 비난을 당해도 상관없지만

파이널 타지는 뭔가 신선하고 독창적이었다는 소리는 나오게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중에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머리 속에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한가지도 남기지 않고 게임 속에 모두 구현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게임 개발팀에게 드래곤 퀘스트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국민 게임이라면

파이널 타지는 좀 더 세련됨을 추구해서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자고 하였다.

이것은 항상 1등인 코카콜라와 그것을 따라가는 펩시가 여러 이슈를 만들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비슷한 전략이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기존의 게임시스템을 승계하면서 정통성을 유지하지만

파이널 타지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면서 게임 팬들에게 그 존재를 알리자는 전략이었다.

그는 파이널 타지 게임 개발에 정말 모든 것을 다 받쳤다.

패미컴 원판 1987.12.18 발매

각고의 노력끝에 드디어 게임을 완성시킨 그는 

다시는 자기 힘으로 이런 멋지고 환상적인 게임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이는 곧 엄청난 자신감으로 발전해서

그는 회사에 파이널 타지 게임 롬팩의 선 주문을 최대한 많이 하자고 요구하였다. 

이미 스퀘어에서도 내부적으로 파이널 판타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지

무려 20만장이나 되는 게임롬을 제작하라고 주문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히트작이 없었던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회사에다가 20만개도 적다면서 생떼를 부렸던 것이다.

자기가 게임을 개발했지만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막상 파이널 타지가 시장에 나오자 게임유저들의 반응은 정말 조용했다.

드래곤 퀘스트와는 정말 비교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게임롬 선주문!
이때까지만 해도 패밀리와 슈퍼패미컴을 만든 닌텐도는 

하드웨어는 일부러 싸게 팔지만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돈을 버는 구조였다. 

닌텐도의 게임기로 게임을 개발한 회사는 무조건 닌텐도를 통해서 게임팩을 만들어야 했다. 

즉 스퀘어가 게임을 완성하면 닌텐도에게 게임팩을 제작해달라고 주문을 해야 한다. 

닌텐도는 그러면 원가보다도 비싼 값에 게임롬팩을 게임 제작사에게 만들어 주었다. 

이를 통해서 닌텐도는 많은 이익을 얻는 구조다. 

또한 생산한 제품이 팔리지 않으면 게임 제작사가 모든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 롬팩을 주문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했다. 

이러한 닌텐도의 정책은 나중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가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옮겨가게 되는 큰 이유가 된다.

파이널 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4) 좋은 게임은 팔리고 만다.

드래곤 퀘스트의 놀라운 성공의 뒷 배경에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발매 4개월 전부터 기대되는 게임 1위였다. 

드래곤 퀘스트를 개발중인 에닉스는 무명의 회사였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일본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만화잡지인 소년점프에서 밀어주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 호리이 유지는 소년점프에서 원고를 기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소년점프 편집부 사람들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마침 소년점프에서는 게임 관련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자

호리이 유지에게 지금 만들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 과정을 원고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호리이 유지는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매주 소년점프에 기고하였다.

소년점프 편집부는 이 원고가 반응이 좋자 상부 상조의 정신으로 드래곤 퀘스트를 적극 홍보를 해준다.

최고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소년점프의 파괴력은 정말 대단했다. 

무명의 게임 제작사에서 만드는 드래곤 퀘스트는 

나오기 전부터 이미 기대 순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최고의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드래곤 볼의 작가인 토리야마 아키라가 드래곤 퀘스트의 캐릭터를 그려준 것도

소년점프의 편집부에서 강력하게 추천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소년 점프가 밀어준 덕분에 드래곤 퀘스트는 발매와 동시에 매진에 매진을 거듭하여

당시로써는 상상하기도 힘든 숫자인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홍보도 없는 상태에서 발매를 시작한 파이널 타지가

처음부터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용했던 시장 반응은 실제 게임을 플레이 했던 사람들이 모이는 중고시장을 중심으로 

파이널 타지에 대한 입소문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파이널 타지는 52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사카구치가 약속했던 드래곤 퀘스트 다음의 2등이라는 목표는 달성하게 된다.

결국 게임의 성공으로 인해서 사카구치의 학력은 영원히 대학 중퇴로 남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파이널 타지가 성공을 하자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게임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이런 기세를 몰아서 1년 후 1988년에 파이널 타지를 발매하며 76만장을 판매하더니

1990년 4월에 발매한 파이널 타지3는 140만장을 판매하며 밀리언 셀러에 등극하게 된다.

이제 파이널 타지는 명실공히 최고의 게임 시리즈가 되면서

드래곤 퀘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었다.

 

파이널 타지는 두 개의 팀이 동시에 게임을 개발한다.

시리즈가 홀수인 팀에서는 게임에 많은 실험과 시도를 통해서 혁신적인 게임개발을 목표로 하고

짝수인 팀에서는 기존 시스템에 더 안정화를 이루고 스토리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이것은 파이널 타지 7과 파이널 판타지 8을 보면 금방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이널 타지 7에서는 혁신적인 3D와 ATB(액티브 배틀 시스템)를 시도하였고

파이널 타지 8에서는 기존 게임시스템에 안정성을 더하고 시나리오에 감동을 더 하였다.

파이널 타지 시리즈는 시리즈가 거듭할수록 인기에 가속도를 붙여온 게임이다.  

패미컴 시절에 100만장에서 슈퍼 패미콤 시절에는 200만장을

그리고 플레이 스테이션에서는 드디어 3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특히 플레이 스테이션에서는 게임 역사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 있는 게임이 되었다.

파이널 타지 7는 킬러소프트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게임역사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파이널 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5) 파이널 판타지 무비 그러나 처참한 실패

파이널 타지의 성공 이후 스퀘어는 일본 최고의 게임 업체가 되어 있었다.  

실속은 에닉스였지만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스퀘어가 최고였다.

에닉스는 오직 드래곤 퀘스트 게임하나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스퀘어는 다양한 게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였다.

로맨싱 사가, 크리노 트리거, 성검 전설 등 많은 프렌차이즈 게임들을 보유하게 되면서

회사의 자금도 탄탄하여 졌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과 성공은 사카구치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다.

성검전설 聖剣伝説, 1991
로맨싱 사가 Romancing Sa・Ga ロマンシング サ・ガ, 1992
크로노 트리거 Chrono Trigger クロノ・トリガー, 1995

원래 스토리가 있는 게임에서 강점을 보였던 그는 이제 

100% 스토리로만 이루어진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가 애플컴퓨터와 드래곤 퀘스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번 겪게 되니 

그것이 바로 토이 스토리이다. 

100% 컴퓨터 그래픽 에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를 본 사카구치는 

자신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한다.

그는 당시 일본의 컴퓨터 그래픽은 대부분 광고에 들어가는 효과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퀄리티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스퀘어 USA를 설립하고 

세계에서 날고 긴다는 일류 급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컴퓨터 그래픽에서 인간과 똑 같은 캐릭터를 창조하자는 것이 그의 당초 목표였다. 

사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었고 도박이었다.

인간과 유사한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하겠다는 것 자체가 너무 원대했고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파이널 타지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서

엄청난 제작비가 드는 풀 CG영화를 만드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사실 이런 무모함 덕분에 파이널 타지 시리즈가 성공했다고 보는 스퀘어는

그의 영화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준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는 감독으로써 영화에 필요한 장면의 그래픽을 적절한 퀄리티에서 타협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오직 장인정신으로 완벽한 화면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는 스케쥴을 생각해서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그림만 그리도록 해야 했는데 

남들은 생각하지 않을 나무의 잎사귀까지 그리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더 완벽하게 그리고 싶어서

최대한 세세하게 온갖 신경을 써서 그리기 마련이다.

이때 그는 단호하게 필요한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을 분류해야 했는데

그는 돈보다는 장인정신을 높이사고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주고 격려를 했던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한 사람이 화면에 나오지도 않는 잎사귀를 3개월 동안 그려도 

사카구치는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퀘어 USA의 분위기는 최고였지만 영화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  

22개국에서 스카우트 해온 175명이 넘는 일류 스탭들과의 영화제작 기간이 4년을 넘어서면서 

제작비는 어느덧 1700억원이 넘어 섰던 것이다.

영화가 완성되자 파이널 타지라는 네임 밸류 덕분에

미국에서만 2400관이 넘는 극장에서 영화가 개봉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처절한 실패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말 사람의 몰락은 한 순간이었다. 회사의 몰락도 눈깜짝할 새였다.

파이널 타지가 미국에서 먼저 개봉하고 전세계에서 영화가 차례로 개봉중이었던 2000년 10월에

스퀘어의 사장이었던 스즈키씨는 영화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전격적으로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Final Fantasy : The Spirits Within, 2001

스퀘어는 이미 영화제작중에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화려했던 스퀘어가 언제 어떻게 망할지도 모르는 바람부는 언덕 위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었다.

다행히 스퀘어의 파이널 타지 시리즈 덕분에 게임기 전쟁에서 승리한 플레이 스테이션이 의리를 앞세워

1500억원을 긴급 지원해주면서 스퀘어의 위기는 일단락 된다.

하지만 스퀘어의 상징이자 아이콘이었던 사카구치는 그야말로 사면 초가였다. 

영화 제작비 1700억원 중에서 회수된 돈은 고작 500억 원에 불과했다. 

스퀘어에서는 1200억 원의 적자 원흉인 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스퀘어를 살릴 수 있는 것 또한 오직 사카구치의 파이널 타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이때 파이널 타지의 온라인화에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주총회가 가만있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하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주식회사의 숙명이었다.

주주총회 에서는 누군가 가 영화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결국 주주들의 거센 요구로 2001년 2월 사카구치는 사실상 해임을 당한다.

*사카구치는 다른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는 그 점을 숨기지 않는다.

트랜실바니아라는 어드벤쳐 게임을 보고서 각종 어드벤쳐 게임을 개발한 그는

드래곤 퀘스트에 감동을 느끼고 파이널 타지를 만든다.

급기야 토이 스토리를 보고서 영화제작에도 뛰어 들었다.

또한 파이널 판타지 11을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한 것도

에버 퀘스트라는 MMORPG게임을 재미있게 하고 나서 개발을 결심했다.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6) 안개속을 걷는 삶 사카구치 히로노부

스퀘어를 그만 두게 된 사카구치는 일본에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하며 종적을 감춘다.  

스퀘어와의 결별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냥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게임과 관련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인생을 즐기면서 그는 최대한의 휴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멋진 곳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1년 6개월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하와의 바다를 산책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이 40이 넘어서 어린 아이처럼 우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맘껏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꾹꾹 참고 참았던 괴롭고 힘들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시에 폭발한 것이었다. 

그냥 안 좋은 일은 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렇게 자기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의 허무함과 상실감이 다시 그의 마음속으로 썰물처럼 밀려왔다.

이렇게 그냥 쓰러지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든 열정을 쏟아 부어서 게임을 만들었던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0년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미스트 워커를 사명으로 결정해서 회사를 창업한다.


미스터 워커는 안개속을 걷는 사람처럼 한치 앞을 볼 수 없지만 

뚜벅뚜벅 자신의 걸음을 앞으로 향하는 그의 의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또한 안개 속에서도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카구치의 낙천적인 성격이 엿보이는 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그의 생각은 차질을 빚는다. 

그가 게임을 개발한다고 하자 천하의 마이크로 소프트가 그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미 그의 파이널 타지 7이 게임 역사를 새로 쓰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에

마이크로 소프트는 그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공 하면서

XBOX360용의 게임을 개발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한다. 구체적인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게임 규모만으로도 파이널 환타지나 드래곤퀘스트급의 게임이 공개된 것으로 보아

엄청난 금액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게임 인생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파이널 타지를 같이 개발 했던 스탭들도 그의 회사에 속속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명소설가 시게마츠 키요시, 드래곤 볼의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와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등도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설가 시게마츠 키요시에게는 한번의 미팅으로 같이 일하기로 했으며 

도리야마 아끼라는 전화 한 통으로 설득하고 이노우에는 술 한잔으로 섭외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말 한마디에 바로 도와주겠다고 하니 그가 쌓아놓은 인덕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그가 게임을 개발하면서 개인생활도 버리고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해서 

얻은 것은 오직 동료들뿐이라고 하더니 실제로 그의 게임을 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 

그의 인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스트워커는 현재 두 개의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 중이다. 

도리야마 아키라가 캐릭터를 맡은 블루 드래곤은 2006년말을 목표로 개발중인 게임이다. 

블루 드래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모험을 그린 게임으로 

만화풍의 그림에 턴방식의 롤플레잉 게임이다. 

도리야마 아키라가 참가한 덕분에 캐릭터들은 드래곤 퀘스트와 흡사한 면이 있다. 

이노우에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로스트 오딧세이는 실사 풍의 그림으로 

플레이어가 눈물이 날 수 있는 정도의 감동을 전해주는 롤플레잉 게임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이 역시 파이널 타지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래곤 퀘스트에 대항해서 블루드래곤을..

파이널 타지에 대항해서 로스트 오딧세이를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Blue Dragon (블루드래곤), 2006
로스트 오디세이 Lost-Odyssey, 2007

이렇게 동시에 일본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을 상대로 자신의 작품을 개발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역시 사카구치가 아니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일 것이다. 

지금 사카구치는 오랜 실패 끝에 파이널 타지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기분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한다.

실패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무서운 사람이다.

그가 지난 날의 처절한 실패를 발판 삼아서 파이널 판타지로 전세계를 놀라게 했듯이

그가 새로운 게임으로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파를 선사하기를 기원한다.

*사카구치는 게임계를 은퇴하려 했다.

스퀘어에서 사임을 한 후 사카구치는 게임계를 영영 떠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꿈인 스설가가 되려고 했다. 

실제 몇 작품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 게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 (7) 그의 게임기획철학

사카구치가 말하는 게임

미스트 워커의 로고는 사카구치가 그의 딸과 같이 만든 것이다.  

20번이나 퇴짜를 놓으면서 딸을 괴롭혔다고 웃는 그를 보면 

그와 가족들의 관계를 쉽게 예상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게임에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크리에이터다.

Mistwalker Corporation (ミストウォーカー)

그의 목표는 게임으로 소설이나 영화가 줄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는 영화제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게임 제작이 본격화 되기 전의 프리 프로덕션단계의 중요함이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실험해 본 다음에 본격제작에 들어가야 

그만큼 시행착오가 줄어들 것 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시간관리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창의적인 일을 할 때와 관리나 경영처럼 그렇지 않은 일을 할 때는

최대한 구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개의 일이 섞이면 결국에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게임 제작 철학은 신선함이다. 

그 게임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것들을 최대한 많이 가지고 있어야 좋은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롤플레잉 게임만을 고집하고 있지만 그러한 롤플레잉 게임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 

이로 인해서 그와 일하는 프로그래머는 고생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게임 안에서 워낙 많은 것들을 시도하다 보니 프로그래머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카구치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개발자들은 절대 엄살을 부리지도 못한다.

그는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유저에게 감정의 전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기분이 통쾌한 감정이면 유저도 역시 통쾌한 감정을 같이 느껴야 한다는 것이 것의 주장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래픽, 사운드, 시스템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카구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누군가가 비웃는다고 해도 그것에 좌절하지 말라고 한다. 

원래 새로운 아이디어라는 것은 기존의 벽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틀에 박힌 사람의 사고속에서 동작하는 비웃음에 신경 써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그런 사람들의 비웃음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이 사카구치의 지론이다.

주요  대표작
1984년 데쓰트랩
1986년 킹스 나이트 스페셜
1987년 파이널 판타지
1995년 크리노 트리거
1998년 패러사이트 이브
2002년 파이널 판타지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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