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티마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리차드 게리엇 (Richard Garriott)은 어떤 인물인가요?

시나리오/게임기획|2019. 11. 6. 03:30

Ultima I, 1981
Ultima I : The First Age of Darkness, 1986

울티마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 (1) 세계 최초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다!

우리는 실감나는 시뮬레이션과 기술적인 혁신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지금까지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게리엇은 오늘날 게임산업을 이끈 개척자중에 하나다. 

1970년대 게임을 개발한 미야모토 시게루가 일본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라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오늘날 일본이라는 세계 게임 강국을 만드는데 공헌했다면

그는 미국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시작과 함께 하였고 오늘날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미야모토 시게루

사실 1980년대 초반만해도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유행하고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나 즐기는 특이한 놀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당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도 그냥 대학에 들어 가기 전에 심심풀이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애플2 컴퓨터로 단지 취미차원에서 게임을 개발했다. 

혼자서 프로그래밍에서 그래픽까지 게임제작의 모든 것을 담당한 그 게임이 바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으로 불리 우는 알카라베스(Akalabeth)이다. 

Akalabeth, World of Doom, 1979

반지의 제왕으로 탄생한 환타지 세계와 테이블 토크 게임으로 불리 우는 던전앤 드래곤스가 

그대로 구현된 이 게임은 게임 역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보통 사람들 생각이 톨킨이 탄생시킨 판타지 세계와 던전앤 드래곤을 컴퓨터 속에서 재현하려 했지만 

그것은 단지 상상속에서 그쳤던 일이었다. 

하지만 리차드 게리엇은 혼자서 그 일을 해낸 것이었다. 

알카라베스(Akalabeth)를 개발한 애플 컴퓨터2는 현재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이니 

그 게임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여러분도 약간은 상상이 될 것이다. 

Akalabeth, World of Doom, 1979

사실 최초보다는 대중화시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비틀즈 전에도 락을 했던 사람은 있었지만 

락을 대중화 시킨 비틀즈가 최고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의미에서 리차드 게리엇의 울티마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대중화시킨 역작중의 역작이다

컴퓨터 게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리즈로 기록되는 울티마로 그는 최초의 던전을 구현하였고

최초로 야외맵을 선보였으며 혁신적인 타일방식의 스크롤로 세계 컴퓨터 게임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이러한 그의 신화는 울티마 온라인을 통해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울티마 온라인이 과연 온라인 게임의 최초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양분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람의 나라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한국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울티마 온라인이 전세계 MMORPG 시장의 시작을 알렸으며 

많은 개발자들의 영감을 제공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전세계의 게임 유저들은 울티마가 처음 서비스 됐을 때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온라인 게임 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울티마 온라인에 받은 자극으로 

컴퓨터 온라인 게임계로 이끌었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다. 

이렇게 개척자 정신으로 세계최초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고 대중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MMORPG의 선구자로써 그의 전설은 어떻게 시작됐었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울티마의 의미
리차드 게리엇 최고의 히트작인 울티마는 어디서 그 의미가 왔을까? 

바로 영어 단어 ULTIMATE에서 어감상 TE를 탈락시켜서 만든 단어이다. 

그래서 ULTIMA는 최후의 혹은 궁극적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울티마의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 (2) 반지의 제왕과 던전앤 드래곤스 그리고 컴퓨터

리차드 게리엇은 우주 연구소에서 우주 비행사로 일하는 

아버지 오웬 개리엇(Owen Garriot)의 아들로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후 두 달 만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이때 리차드 게리엇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그의 집안은 정말 학구적인 집안의 전형과도 같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어머니는 예술학 석사를 받았다.

큰형은 나중에 의사가 되고 다른 형도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여동생 또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명문대학으로 일컬는 텍사스대학을 나온 그가 어린 시절 공부 때문에 기가 죽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집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휴스턴에 있는 클리어 클릭 고등학교 시절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 여러 경험들이 현재의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는 닉네임인 로드 브리티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영국식 억양을 사용하였는데 

학교 선배들이 그의 그런 말하는 모습에 로드 브리티시라면서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평소부터 자신은 영국의 귀족출신이라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로드 브리티시라는 별명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마음에 쏙 들어 했다. 

형수로부터 받은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도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자신이 완전히 딴 세상으로 간듯한 착각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책에 매료된다. 
그는 이후 각종 판타지 소설을 독파하였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판타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의 자작소설들이 현재의 위대한 게임 스토리 텔러가 되는데 큰 자양분이 된다. 

반지의 제왕, The first single volume edition (1968)

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완벽한 판타지 매니아가 되었다. 

그래서 판타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가 판타지를 소재로 한 보드게임의 일종인

TRPG(Table Role Playing Game) 게임 던전앤 드래곤스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74년에 등장한 TRPG인 던전 앤 드래곤스는 반지의 제왕을 그대로 게임속에 구현하여 

많은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간 게임이었다. 

당시 던전앤 드래곤스에 빠져든 청소년들이 학업에 소홀해지자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학부모 단체에서는 비교육적인 게임이라면서 판매금지운동을 펼치기 까지 하였다.

Dungeons & Dragons (D&D)

던전앤 드래곤스에서 게임의 마스터는 

어떤 목표가 되는 이야기를 만든 후에 규칙에 따라서 게임을 진행한다. 

그러면 참여자는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실제 연기도 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잘 헤쳐나가며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매일 친구들과 모여서 던전앤 드래곤스를 즐기던 그는 

어느 날 컴퓨터를 처음 본 순간 왠지 모르는 흥분을 느끼게 된다.

영웅의 여행, Heroes Journey

그는 컴퓨터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유치원 때부터 과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실제로 두 과목의 성적은 항상 A학점 이였고

선생님이 없는 가운데 학습토론을 하면 리차드 게리엇이 항상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그는 특히 시간이 날 때마다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학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로 과학현상을 설명하는 실습자료였다.

그러던 차에 컴퓨터의 등장은 그에게 과학적 호기심을 다시 한번 발동시킨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날 그의 고등학교에서는 정부의 지원으로 컴퓨터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정작 아무도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물론 학교에는 컴퓨터관련 교육 과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교장선생님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목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교장은 교육을 시켜줄 선생도 없고 참고할만한 교과서도 없다면서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희망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자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리차드 게리엇이 포부를 밝히자 

결국 교장은 그의 의지를 믿고서 그의 소원대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교과 과목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컴퓨터 프로그래밍반을 만든 그는 친구들을 규합해서 컴퓨터 게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던전앤 드래곤스를 컴퓨터 게임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사실 그가 컴퓨터를 보자마자 게임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그 자체로도 엄청난 발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게임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의 얘기였을 뿐이다. 

게다가 퐁처럼 간단한 테니스게임이나 존재했던 세상에 이미 롤플레잉 게임을 구현하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던 그 시기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던 학교도 학원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독학으로 컴퓨터 게임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게다가 당시만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지금처럼 키보드로 코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때는 테이프타입 용지에다가 점을 찍어서 코딩을 하던 시대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형식대로 코딩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수 용지에 점을 찍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하는 노가다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학교친구들과 함께 자체적인 프로젝트로 컴퓨터를 연구해서 게임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 던전앤 드래곤스를 게임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게임 이름에 D&D라는 프로젝트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내내 만든 게임이 무려 28개인데 

이들 게임의 명칭은 모두 D&D1~ D&D28 과 같은 형식으로 지었다. 
그가 이렇게 결과물을 내놓자 학교 선생님은 그에게 과학점수 A학점을 주며 

그의 공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호기심과 과학적 탐구심 

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디어와 인내심이 만들어낸 성공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학창시절 때의 이런 소중한 경험이 오늘날의 리차드 게리엇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울티마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 (3) 알카라베스와 울티마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

이공계 학과에서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텍사스 대학에 합격한 리차드 게리엇은 

대학에 입학 하기 전에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컴퓨터 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컴퓨터 랜드는 애플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각종 소모품을 파는 컴퓨터 상점이었다. 

그는 매장에 있는 애플컴퓨터를 이용해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세계최초로 그래픽을 지원하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정받는 

알카라베스(Akalabeth) 를 전격적으로 개발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전혀 몰랐다. 

단지 컴퓨터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깐 

자신의 게임을 상점에서 팔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게임을 완성한 그는 200 달러를 들여서 

직접 디스크에 게임을 복사하고 플라스틱 가방으로 포장을 하였다. 

그리고 게임의 매뉴얼을 직접 쓰고 사진까지 찍어서 게임 설명을 덧붙였다. 

게임 개발에서부터 포장 그리고 상품판매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원맨 제작시스템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사례이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도 힘든 이야기지만 1979년만해도 게임은 만들어서 판다는 개념이 아니라 

마니아들이 게임을 만들어서 서로 복사하거나 교환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때이다. 

게임이라는 개념자체가 생소했고 게임을 만들어서 판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었을 때 

리차드 게리엇은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다 헤쳐 나간 것이다. 

고작 고등학교 3학년인 열 아홉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알카라베스를 모두 다섯 개밖에 팔지 못하여 약간 실망을 한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그의 게임을 좋아했던 컴퓨터 랜드의 상점 점장이 리차드 게리엇 몰래 

소프트웨어 유통업체인 캘리포니아 퍼시픽 관계자에게 게임을 유통해달라면서 소포로 보낸다. 

게임을 받아본 캘리포니아 퍼시픽 관계자들은 그 게임의 가치를 알았고 

바로 리차드 게리엇에게 전화를 걸어서 일체의 여행경비를 지불할 테니 

본사인 캘리포니아로 와서 계약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그는 그 전화가 의심스러웠다. 

거액의 돈을 주고서 자기의 게임을 계약하자고 하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공항에 마중 나와서 리차드 게리엇을 접대했을 뿐만 아니라 

고급차를 렌트까지 해주었으며 고급호텔로 리차드 게리엇을 안내했다. 

국빈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은 그는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알카라베스(Akalabeth)는 캘리퍼 퍼시픽관계자가 예상한데로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그는 게임 카피 하나당 5달러를 받기로 하였는데 

게임이 3만개를 판매함에 따라서 15만달러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돈은 리차드 게리엇이 대학 4년 동안 학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텍사스 대학에 들어간 그는 다시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두 개의 서클에 가입하는데 하나는 펜싱 동아리였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 시대착오주의(creative anachronism)로 불리 우는 동아리였다. 

창조적 시대 착오주의 클럽은 각종 보드게임과 환타지 소설에 관해서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창조적인 예술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중세시대 복장으로 코스튬플레이(유명캐릭터를 흉내내는 행위)를 하면서 이벤트를 여는 등 

꽤 유명한 학교 클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켄 아놀드나(Ken Arnold)나 데이비드 웨스턴(David Watson)처럼 

차후에 울티마 프로젝트에 같이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차츰 대학생활에 익숙해지자 그는 다시 게임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틈틈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울티마 1과 울티마 2를 연속적으로 발매한다. 

역시 시장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취미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리차드 게리엇은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게임 사업을 결심하게 된다.

Ultima II : The Revenge of the Enchantress, 1982

첫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목에서 F 학점을 맞게 되는 사건이다. 

세계 최초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한 그가 F 학점을 맞게 되자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 들일 수 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주 잘 실행되었던 프로그램이 정작 학교에서는 실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그래밍에 자신이 있었던 그 에게는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고 

그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울티마 2의 유통을 맡았던 시에라 온라인과의 불화는 

리차드 게리엇이 학교를 중퇴하는데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시에라 온라인이 게임 판매 이익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기 회사를 직접 차릴 결심을 한 것이다. 

결국 그는 가족에게 대학을 그만둘 것이라고 폭탄 선언을 한다. 

가족들이 모두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일제히 호응을 해준다. 

그런 반응에 리차드 게리엇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그냥 일시적으로 한번 호기심으로 사업을 해보는 것이라 생각을 했다. 

젊은 시절에 사업 경험을 가진다는 차원에서 그의 회사 창업을 반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언젠가는 대학으로 돌아가서 진짜 직업을 가지리라고 봤던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게리엇이 게임을 팔아서 부수입을 짭짤하게 거두는 것을 직접 지켜본 가족들은 

그가 큰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울티마의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 (4) 오리진 시스템즈의 영광과 좌절

리차드 게리엇은 마침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공부하고 있던 형 

로버트 게리엇(현재 미국 NC 소프트 대표로 있다.)의 도움을 받아서 오리진 시스템즈를 창업한다. 

이 때문에 개발은 리차드 게리엇이 머무는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진행하고 

재정과 홍보 같은 회사의 기타 업무는 메사추세추 주에서 로버트 게리엇이 업무를 처리했다. 

로버트 게리엇은 나중에 석사학위를 받고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에서 합류를 한다.  

오리진 시스템즈의 울티마 3는 보다 강력해진 그래픽에 파티 시스템을 첨가하였다.

시장에 발매된 울티마 3는

역시 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Ultima III : Exodus, 1983

어느덧 리차드 게리엇이나 그의 집안에서도 

이제 게임 개발은 취미나 장난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친 가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때 게임 시리즈 역사상 최고로 평가 받는 대망의 울티마 4탄을 개발하면서

세계 게임사를 다시 새로 쓴다.

사실 기존의 울티마는 그냥 이름만 같았던 게임이었고 게임간의 연관성이 적었다.

세계관도 어설펐고 스토리도 악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정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게임을 개발하면서 얻은 모든 경험과 지식을 쏟아 부어서 4탄을 발매하였고 

게임 시리즈 전체 역사상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는 이게임을 만들고 나서 울티마 게임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고 할 정도로 

정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구현해냈다.

울티마 4의 특징은 철학과 윤리로 대표된다. 

이른바 명성시스템을 도입해서 플레이어가 얼마나 도덕적인 상태에서 적들을 쓰러뜨렸는지가 

게임 내용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는 게임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게임 세계관의 깊이가 철학적인 이슈까지 담고 있다면서 

엄청난 극찬을 들을 수 있었다.

Ultima IV : Quest of the Avatar, 1985

이렇게 울티마의 전성기는 5탄과 6탄까지 계속되면서 매해 가장 최고의 게임으로 등극하더니 

어느덧 울티마 시리즈는 롤플레잉 게임중에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다.

Ultima IV : Quest of the Avatar, 1988
Ultima VI : The False Prophet, 1990

이렇게 승승장구 하던 오리진 시스템즈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울티마 7이었다. 

울티마 7은 사상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거대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울티마 7탄은 버그 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발매연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회사의 자금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오직 울티마 7탄만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면서 회사의 모든 자금을 쏟아 부었고 출시는 겨우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실제 구입해서 플레이한 유저들은 수많은 버그와 오류속에서 치를 떨어야 했다. 

제대로 버그테스트를 하지 않고 성급하게 게임을 내놓은 결과였다. 

이는 회사에 치명타를 가했다. 

소비자들의 항의는 계속되었고 게임의 판매는 저조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오리진 시스템즈는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에 이르고야 만다.

Ultima VII : The Black Gate, 1992
Ultima VII Part Two : Serpent Isle, 1993

하지만 이때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유통업체인 EA가 오리진 시스템즈에 인수를 제의한다.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리차드 게리엇은 주식을 넘기는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금액을 받는다.

EA의 인수로 오리진 시스템즈는 다시 자금에 여유가 생겼다.

이 덕분에 오리진 시스템즈는 울티마 8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98년도에 발매된 울티마는 유감스럽게도 롤플레잉 게임이 아니라 액션게임에 불과했다.

기존에 머리를 쓰고 스토리를 음미하던 게임이 아니라

슈퍼 마리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울티마 8탄으로 인해서 그동안 울티마 시리즈가 쌓아 놓은 명성이

일거에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회사에 팽배해졌다. 

Pagan Ultima VIII, 1994

이때 마침 회사에서는 울티마 온라인을 진행 중이었다. 

정식작업은 아니었고 단지 실험적인 차원에서 운영하던 프로젝트였다. 

세계최초의 혁신적인 게임을 지향하는 오리진 시스템즈는 

언젠가는 온라인 게임이 주류가 될 것이라는 예상으로 테스트 성격의 팀을 가동 중 이었던 것이다.

처음 울티마 온라인팀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둠과 같은 3D게임으로 제작 중이었다. 

하지만 번번히 기술적인 실패를 하면서 좌절 중 이었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 줄이고 과거의 게임인 울티마 6탄의 엔진을 기초로 해서

다시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하자 게임의 재미도 있으면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게임 기술이 확보되자 회사에서는 울티마 온라인 게임의 시장성을 예측하고 

게임 프로젝트를 본격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때 리차드 게리엇도 울티마 온라인팀에 합류해서 게임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도에 울티마 온라인의 상용서비스를 실시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으로 인해서 리차드 게리엇과 EA 사이에는 앙금이 쌓이게 된다. 
사실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할 때만해도 EA측에서는 기존에 성공모델이 없다면서 반대를 하였다. 

그가 울티마 온라인팀에 합류하려 하자 돈도 안 되는 온라인팀에 끼지 말고 9탄이나 만들라고 하였다. 

그랬던 사람들이 울티마 온라인이 성공하자 태도가 싹 달라 졌다. 

리차드 게리엇과는 아무런 합의도 하지 않고서 EA 독단으로 울티마 온라인 3D부터

울티마 온라인2, 해리포터 온라인, 윙커맨더 온라인 제작 계획을 전세계에 발표한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성공하겠느냐며 비아냥 거렸던 그들이 이제 

오리진 시스템즈가 세계최고의 온라인 게임회사라면서 회사 운영계획을 마음대로 짰던 것이다. 

이런 문제로 EA와 그의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때 마침 울티마 9이 발매되었고 유감스럽게도 시장에서 저조한 판매기록을 남겼다. 

Ultima IX : Ascension, 1999

EA는 이때다 싶었던지 희생양으로 리차드 게리엇을 지목하고 사퇴압력을 넣는다. 

결국 그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오리진 시스템즈를 2000년도에 떠나고 만다. 

사실상 쫓겨난 거와 다름 없었다. 

1년 이상 동종업계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계약으로 인해서 

그는 이때 잠정적인 휴식을 선언하고 세계의 오지를 탐험한다. 
그러던 2001년에 리차드 게리엇은 한국의 NC소프트 미국 지사장인 송재경씨를 만나게 된다. 

송재경씨는 원래 울티마를 통해서 게임 제작자가 될 것을 결심할 정도로 게임의 추종자였다. 

그는 리차드 게리엇의 진가를 잘 알고 있었다. 

송재경씨는 400억 원 이나 되는 거액을 들여서 리차드 게리엇을 스카우트 하려 했다.

400억이라는 돈이 터무니 없이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 게임 개발자에게 40억씩 10군데의 게임 개발업체에 지원해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얘기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필자는 송재경씨의 선택이 훨씬 현명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때의 선택이 옳았음은 이미 증명됐다고 확신한다. 

우선 송재경씨는 미국에서 이미 한국의 NC소프트로는 글로벌 기업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NC 소프트를 세계적으로 알릴 이슈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리니지를 미국에서 서비스 하기 위해서 관련 경력자를 모집하려 했을 때 

아무도 NC소프트에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NC소프트가 당시 이미 연간 매출 천억이 넘었던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사람에게는 생소한 회사였다. 

미국 개발자를 스카우트 하려 해도 그들은 송재경씨의 신분자체를 의심해서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송재경씨는 회사의 규모도 알리면서 미국 개발자들을 스카우트 할 수 있는 실력자를 알아봐야 했다.

전 엔씨소프트 개발자 송재경

그리고 그 해답은 리차드 게리엇이었다. 

그가 오리진 시스템즈를 나왔을 때 그를 따라서 20명이나 되는 고급 기술자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뿐인가? 텍사스 오스틴은 미국 게임개발사들의 메카다. 

그런데 그런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존경 받는 게임 크리에이터인 리차드 게리엇 옆에서 

일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게임은 사람이 많다고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천재들이 만들어 가는 산업이다. 

그런 측면에서 리차드 게리엇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언론의 취재대상이 되는 

슈퍼 스타급의 게임 크리에이터였다.

그를 영입한 후에 얼마나 많은 잡지와 신문들이 그의 소식을 특종으로 보도하였는지를 살펴보면 

광고비용 차원에서도 400억원 이라는 돈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기사에는 항상 NC소프트가 어떤 회사인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현황과 함께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환경까지 설명을 해주어서 

NC소프트뿐만 아니라 한국의 위상까지 올라가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리차드 게리엇 덕분에 미국 게임개발자들을 스카우트하기가 손쉬워졌다. 

우선 2004년도 최고의 MMORPG게임으로 뽑힌 시티 오브 히어로즈만 해도 

그가 만남을 주선해서 퍼블리싱 계약을 했다. 

또한 올해 발매되어 100만장을 넘게 판매한 길드 워를 만든 아레나 넷만 해도 

리차드 게리엇이 그들을 발굴했고 NC소프트가 인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미국의 NC 소프트 법인은 흑자를 기록했고 

앞으로도 본사의 지원 없이 충분히 경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금까지 확보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4년 동안 먹튀라는 오명을 들으면서까지 개발을 했던 

타뷸라 라사가 발매될 예정이다. 

4년 동안의 개발과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그건 정말 게임개발의 속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처음 팀을 만들어서 새로운 형태의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항상 시행착오를 거치가 마련이다. 

스즈키 유나 빌 로퍼만해도 개발중인 게임을 엎어서 새로 개발했고 나중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란 투리스모 1탄은 개발 기간이 4년이나 걸렸다. 

게임이란 만들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대작의 경우는 4년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벌써부터 그것 봐라 하면서 고소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제 그는 2006년도에 게임을 공개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이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쓸데 없는 비웃음 보다는 그가 어떤 게임을 선보일지 기대를 하도록 하자.  

게임의 적은 게임이 아니다.

게임의 라이벌은 오히려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즐기는 인터넷이나 영화 같은

다른 문화산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여가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가장 즐겁게 해줄 것에 투자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싸이를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드라마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게임을 하기도 한다.

결국 게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싸이를 하는 사람을 게임계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게임관련 종사자라면 당연히 좋은 게임이 나와서 

전체 게임 산업계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진정한 바램이어야 한다. 

무작정 게임의 실패를 바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리차드 게리엇이 누구인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게임산업계를 

오늘날 이렇게 당당하게 문화산업으로 대접받게 만든 컴퓨터 게임계의 영웅 아닌가?  

그는 지금까지 많은 혁신으로 게임산업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의 실패 보다는 그가 성공적인 게임을 통해서 

컴퓨터 산업계에 긍정적인 변화의 물꼬를 제공해주기를 기원하는 것이 

게임업계 종사자나 게임 마니아에게 가장 타당한 바램이 아닐까 싶다.

울티마의 아버지 리차드 게리엇 (5) 그의 게임 개발철학과 삶

리차드 게리엇이 생각하는 게임이란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고 외쳤던 오리진의 모토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의미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톨킨은 단순히 스토리만 쓴 것이 아니라 환타지라는 세상을 창조하였다. 

반지의 제왕 속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은 모두 그들의 전설과 역사가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관습이 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톨킨이 창조해내었다. 

그 역시 톨킨처럼 울티마를 통해서 그의 세상을 창조하려 하였다. 

그리고 리차드 게리엇은 

그가 창조한 세상을 단순히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게임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들을 현실에서도 재현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단지 화려한 게임쇼에서 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쇼맨쉽이라고 보기에는 

그가 사는 방식은 확실히 다르다. 

우선 그의 집을 보면 울티마에서 등장하는 중세스타일의 성이다. 

텍사스에서도 명물로 꼽히는 이 집은 매년 할로윈 파티 때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게임팬들이

각자 코스튬플레이를 해서 화려한 파티를 연다.

그리고 겉모습은 성으로 되어 있는 그의 집 내부는 각종 장애물과 미로로 이루어진 던전이 있다.

여기서 초대된 손님들은 던전의 장애물을 빨리 빠져 나오는 대회를 열기도 한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이 던전을 쉽게 빠져 나오자

전체 던전의 크기를 넓히기 위해서 집 전체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그는 크리에이터가 게임과 실제 생활이 하나가 되어서 게임을 만들어야 

많은 게임유저들이 현실감을 느끼는 그런 게임을 개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모험이 영원한 테마인 롤플레잉 게임 크리에이터답게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며 탐험을 즐긴다.

이미 보통의 민간인으로는 힘들다는 남극에도 두 번 이나 다녀왔으며

타이타닉이 침몰한 곳을 탐험하다가 과거에 침몰했던 배를 찾아 낼 정도로 모험에 적극적이다.

이제는 지구 내에서의 모험은 지겨웠는지 그는 몸소 우주여행을 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항공우주국에서 우주 비행사 훈련을 받고 있다.

결국 그가 생각하는 게임이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과 게임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가 실제 생활에서 보여주듯이 게임속의 세상을 현실에서도 재현하고 체험해보려는 노력이 

게임의 아이디어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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