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공업의 역사와 변천

과학/과학|2022. 6. 14. 08:00

목차
Ⅰ. 화학공학자란 무엇인가?
Ⅱ.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1: 자리잡기 - 1888년의 화학공학
Ⅲ.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2: 화학공학의 확립
Ⅳ.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3: 공헌의 세기
Ⅴ. 오늘날의 화학공학


Ⅰ. 화학공학자란 무엇인가?

화학공학자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① 화학 약품을 제조하는 공학자, ② 공장에서 일하는 화학자, 혹은 ③ 미화된 배관공?

정답은 ④ "보기 중 답 없음"이다. (유체역학에서 "관을 통한 흐름"에 관한 예제에 혹독하게 시달린 화학 공학도라면 ③를 선택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두 오답은 단지 "화학공학자" 라는 이름 자체의 한정된 의미로만 본다면 그럴듯하다. 물론 말 그대로 "화학공학자"라면 "물건을 만드는 화학자"이거나 "화학약품을 만드는 공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언어란 항상 완전히 뜻이 통하지는 않는다. "화학공학자"가 그 적절한 예다.

1. 그렇다면 화학공학자란?

화학공학자가 화학과 친숙한 공학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화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화학제품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명칭만 가지고 화학공학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화학공학자라는 말은 화학공학자가 하는 일의 유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야가 어떤 면에서 다른 공학 부문과 다른가를 나타낸다.

모든 공학자들은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학, 물리학, 공학기술을 사용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대하고도 강력한 과학인 화학을 이용하는 것은 화학공학뿐이다. 화학과 화학공학을 잇는 강력한 기술적, 사회적 연대는 공학의 다른 부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화학자와 화공학자의 이 결합은 관계자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직업고유의 광범위한 과학적, 기술적 지식 때문에 화학공학자들은 Universal Engineer라고도 불려진다. 바로 그렇다. 국한된 지식의 전문가를 연상하게 하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화학공학자는 넓은 범위의 기술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다재다능한 고용인인 것이다.

2. "Universal Engineer"란 무엇을 뜻하는가?

지난 100여년 동안 화학공학자들은 우리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 이 업적은 미국화학공학회 (AIChE : American Institute of Chemical Engineers)에 의해 작성된 화학공학의 10대 업적으로 요약된다.

(1) 원자: 생물학, 의학, 야금학, 발전기술 등은 원자분열과 동위원소 분리가 가능해짐에 따라 대변혁을 맞이했다. 이러한 성과를 가져오는데는 화학공학자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했으며 이들과 듀퐁사의 Hanford 화학공장과 같은 시설덕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원자폭탄에 의한 돌발적인 결론으로 치닫게 되었다. 오늘날 이 기술들은 좀 더 평화적인 일에 사용되고 있다. 의사들은 신체기능을 모니터하고, 동맥과 혈관의 막힌 곳을 재빨리 찾아내기 위해 동위원소를 사용한다. 생물학자들은 이를 통해 생명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에 대한 매우 귀중한 통찰을 할 수 있으며, 고고학자들은 유물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2) 합성물질의 시대: 19세기에 고분자 화학은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화학공학자들이 고분자물질을 경제적으로 생산가능하게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1908년 Bakelite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합성물질 시대의 개막을 알렸으며, 곧 전기 절연, 플러그와 소켓, 시계 받침대, 철제 요리 기구의 손잡이, 유행을 따르는 보석 등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플라스틱의 사용은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현재 플라스틱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인간 반응기: 화학공학자들은 오랫동안 복잡한 화학 공정들을 열교환기, 여과기 , 화학 반응기 등등의 것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단위조작(unit operations)" 들로 나누어서 연구해왔다. 인체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분석되어 왔는데 그럼으로써 임상 치료를 향상시켰고, 진료와 치료 기구의 개선을 가져왔으며 , 인공 기관과 같은 놀라운 기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의사와 화학공학자는 우리가 한껏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협력하여 연구하고 있다.

(4) 대중을 위한 놀라운 약품: 화학공학자들은 변종과 특별한 발효기술을 통해 Arther Fleming경 (1929년에 페니실린 발견)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개발된 항생물질의 수율을 몇천배 증가시킬 수 있었다. 화학공학자들의 작업 덕분에 낮은 가격, 풍부한 양의 약품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화학공학자들은 종종 공업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한때는 희귀했던 물질을 모든 사회 구성원이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5) 양들의 좋은 친구, 합성 섬유: 담요와 옷에서부터 침대, 베개에 이르기까지, 합성 섬유는 우리에게 밤새 따뜻하고 편안한 휴식을 준다. 합성 섬유는 면과 모에 대한 동물 자원에의 부담을 완화시켜주었으며, 특별한 용도에 맞춰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나일론 스타킹은 다리를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케블라섬유로 만들어진 방탄 조끼는 경찰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6) 액화 기체: 대부분이 질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공기를 매우 낮은 온도 (영하 320℉ 가량)로 냉각시키면 액화된다. 화학공학자들은 기체를 냉각시켜 액화된 기체를 각각의 순수한 구성성분으로 분리하는 데에 저온학을 이용하였으며, 이 물질들을 운반하기 위해 진공 - 절연 탱크 트럭 (마치 커다란 보온병과 같은)을 개발하였다. 질소는 석유를 회수하고, 음식을 얼리고, 반도체를 생산하는 일에 쓰이고, 또한 불활성기체로 사용되며, 산소는 강철을 만들고, 구리를 제련하고, 금속을 용접하고, 병원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데에 사용된다.

(7) 환경, 우리가 살아야 할 곳: 화학공학자들은 어제의 쓰레기를 청소하고 내일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경제적인 해답을 준다. 촉매 전환기, 개질된 가솔린, 굴뚝가스 세척탑 등은 모두 환경을 깨끗이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화학공학자들은 합성 물질로의 대체, 더 효율적인 공정, 그리고 새로운 재생 기술 등을 통해 천연 자원에 대한 부담을 감소시키고 있다.

(8) 음식,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질소, 칼륨, 인이 필요하다. 화학비료는 작물에 영양을 공급하고 , 자라난 농작물은 우리에게 풍부하고 균형 잡힌 영양을 제공한다. 또 비료는 중국이나 인도,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식량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화학공학자들은 식품 가공의 최전방에 있으며, 생물공학의 발달이 식량생산을 더욱 더 증가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9) 석유 화학 제품, "검은 황금, 텍사스의 차(tea)": 화학공학자들은 원유 속에 있던 복잡한 유기 화합물을 훨씬 단순한 종류의 화합물로 깨뜨려 만들기 위해 촉매분해법을 개발했다. 반응 후 이 토막들은 가솔린, 윤활유, 플라스틱, 합성고무, 합성섬유 등을 포함한 많은 유용한 제품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리되고 재결합된다. 이 때문에 석유 공정은 가능성을 주는 기술로 인식되며, 대부분의 현대적인 것들이 석유 없이는 그 기능을 멈추게 될 것이다.

(10) 합성 고무를 기반으로: 화학공학자들은 합성 고무 개발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 2 차 세계 대전동안 합성 고무는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되었는데 이는 근대 사회가 고무를 기반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운동화는 제외하더라도) 타이어, 개스켓, 호스, 컨베이어 벨트 등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운전을 하든, 자전거를 타든, 롤러블레이드를 타든, 달리든 간에 확실한 점은 우리가 고무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3. 화학공학의 현재와 미래

현대 사회에서 여러 분야의 공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중에 화학공학자는 수적으로는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화학공학자들이 여러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화학공학자들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물질을 값나가는 제품으로 만드는 화학 공정에 관여한다. 이는 설계, 시험, 규모 확장, 가동, 제어, 최적화 등의 모든 면을 포함하며, 증류, 혼합, 생물학적 공정과 같이 그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위 조작"에 대한 정량적 이해를 요구한다. 화학공학에서는 이러한 "단위 조작"들을 개선하고 분석하기 위해 열역학, 화학반응속도론과 함께 물질, 운동량, 에너지전달을 사용한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오늘날 미국에는 약 70000명 가량의 현직 화학공학자들이 있으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금 생존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화학공학자라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은 135000명 정도뿐이다. 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화학공학자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지금 살아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학 공학은 과거의 성과에 안착하여 있는 직업이 아니다. 화학 공학의 위업달성은 아직도 진행중인 것이다.


Ⅱ.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1: 자리잡기 - 1888년의 화학공학

사실상 화학공학에 관련된 직업은 1888년에 나타났다. "화학공학자"라는 용어자체는 1880년대에 기술업계에서 떠돌았었으나 그에 대한 정식 교육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화학공학자"란 화학 장치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진 기계 공학자들이나 평생동안의 화학공학적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거의 교육을 못 받은 화학공장의 주임, 혹은 대규모 공업화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응용화학자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1880년, "화학공학협회"를 통해 이런 다양한 전문 직업인들을 결속시키려던 George Davis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이런 혼란한 사태는 1888년 MIT의 Lewis Norton교수가 "Course X(ten)"을 도입하여 공식적인 학위를 통해 화학공학자들을 결속시킴으로써 변화했다. 펜실바니아 대학이나 Tulane대학과 같은 다른 학교들도 각각 1892년, 1894년에 4년제 화학공학 학과과정을 도입하였다.

1. 영국에서 필요로 한 화학공학

산업 혁명(18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이 매우 빠르게 진척됨에 따라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기본적인 화학약품들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산업용 화학약품"이라 불리는 이들 중 첫 번째는 황산이었다. 한 국가의 산업은 그 나라의 황산 산업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가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이렇다고 볼 때, 영국의 생산업자들이 황산 제조 공정을 개선하는데 수많은 시간, 돈, 노력을 쏟아 부은 것도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공업에 의해 소비되는 거대한 양의 황산을 생각한다면, 제조시의 약간의 절감으로도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황산의 제조: 연실법(Lead-Chamber Method)은 1749년 이후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면서도 거의 이해되지 않은 황산 제조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공기, 물, 이산화황, 질산염, 매우 큰 납 컨테이너를 필요로 하였는데 이 중 질산염은 대개 가장 비싼 재료이기 마련이었다. 이는 공정의 마지막 단계동안 산화질소의 형태를 띤 질산염이 대기 중으로 영구 소실되어 새로이 질산염을 공급해주어야 하고 질산나트륨의 형태로 공급되는 이 질산염은 칠레에서 수입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1859년에 John Glover는 질산염의 일부를 회수하기 위해 물질전달 탑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제안한 탑에서 질산염을 포함한 황산은 연소 가스와 반대방향으로 - 아래로 - 천천히 흐르고, 위로 올라오는 가스는 산화 질소의 일부를 흡수한 후 다시 연실로 회수되어 산화 질소를 재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Glover 탑은 19세기 근간의 화학 공업의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생산비의 절감은 화학 공장의 급속한 발전과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화학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Glover 탑과 같이 혁신적인 조작법을 이용하는, 잘 설계된 공장의 유무는 곧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 알칼리와 르 블랑(Le Blanc)법: 화학 산업에 있어 또 다른 경쟁적인 분야는 소다회(soda ash : Na2CO3)와 가성 칼리(potash : K2CO3)의 제조 분야였다. 이러한 알칼리 화합물들은 유리, 비누, 직물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로 인해 막대한 양이 요구되었다. 1700년 말엽, 영국의 나무가 거의 사라짐에 따라 영국 내 소다회의 천연 자원은 해변에서 볼 수 있는 kelp(해초의 일종)뿐이었다. 알칼리는 미국에서는 나무 재(potash)의 형태로, 스페인에서는 barilla(알칼리를 25% 포함한 식물)의 형태로, 이집트에서는 채굴된 소다의 형태로 수입되었는데 그 수송비용 때문에 매우 비싸게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Nicholas Le Blanc이라는 한 프랑스인이 보통의 소금을 소다회로 바꾸는 공정을 개발함으로써 영국은 더 이상 수입 소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르 블랑법은 영국에서 1810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 후 80여년에 걸친 공학적 노력을 통해 꾸준히 개선되었다. 이 시도의 대부분은 공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염산, 산화질소, 황, 망간, 염소기체 등을 재생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3) 소다회와 솔베이법(Solvay Process): 1873년, 기다려 마지않던 새로운 알칼리 생산공정이 순식간에 르 블랑법을 대체하며 영국을 휩쓸었다. 새로운 이 솔베이법은 화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르 블랑법보다 훨씬 명백하였으나, 요구되는 기술은 몇 배 더 복잡하였다. 솔베이법의 간단한 화학은 일찍이 1811년에 A.J. Fresnel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60년 후 솔베이가 성공할 때까지는 규모를 확장하려는 시도자체가 무익하다고 여겨져왔다. 이것이 바로 이 공정이 Fresnel법이 아닌 솔베이법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이다.

솔베이법의 핵심은 80 피트 높이의 고효율 탄화 탑이다. 이산화탄소 기체가 탑의 바닥으로부터 위쪽으로 올라오는 동안 꼭대기에서는 암모니아화 브린을 쏟아 붓고 이 화학약품들은 탑 속에서 반응하여 탄산나트륨을 생성한다. 솔베이법의 기술은 유독한 부산물이 없으며 정제가 용이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연속 조작법에 기반을 둔다. 1880년까지 솔베이법은 르 블랑법을 확실히 그리고 급속히 대신하였다.

(4) 조지 데이비스(George Davis): 조지 데이비스는 영국의 "중부지방"에서온 평범한 알칼리 검사관이었다. 그의 매일 일과는 그 지역 안에 있는 많은 화학 공장들을 둘러보는 것이었으며 그의 담당 구역에는 당연히 연실법, 솔베이법, 르 블랑법을 사용하는, 공학적 노력에 의해 혁명적 변화를 겪은 공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업에 있어서의 이러한 혁명은 응용 화학과 전통적인 공학 둘 다를 어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학 분야의 필요성을 명백히 해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에 따라 1880년 조지 데이비스는 "화학공학협회"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비록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그는 꺾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화학공학의 증진에 힘썼다.

1884년 데이비스는 그가 수년 동안 얻은 화학 지식을 종합하고 응용하는 독립적인 콘설턴트가 되었으며, 1887년에는 이러한 지식들을 가지고 맨체스터 기술 학교에서 화학공학에 관해 잇달아 12개의 강좌를 열었다. 이 화학공학 과정은 각각의 화학 조작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이었고, 후에 "단위 조작(unit operation)"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는 실험을 통하여 이 조작들을 탐구했으며 영국의 화학 공업이 수년간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게 된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강좌가 단지 영국업계의 비밀을 다른 나라에 알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같은 노력의 성과로 다른 이들은 화학공학의 시대가 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화학공학에의 요구가 영국에서와 같이 절실하고 시급한 대서양 건너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2. 미국의 화학공학

1888년 미국인들은 대서양 건너편의 소식을 전해주던 한 지방 신문에 의해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놀라게 한 것은 화학공학의 출현이 아니었다. 대신 머릿기사를 차지한 것은 안개 속에서 6명의 여자들을 살해함으로써 런던 거리를 뒤흔든 "살인광 잭"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계 최초의 연쇄 살인범을 둘러싼 거짓 소문과 센세이셔널리즘, 과장된 보도 등으로 화학공학의 출현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는 듯 했다. 그러나 몇몇은 조지 데이비스가 제시한 화학공학에 대한 청사진의 진가를 인정하였다.

데이비스가 강연을 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MIT의 화학교수인 Lewis Norton은 "Course X (ten)" 이라고 하는 최초의 4년제 화학공학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곧 펜실바니아 대학이나 Tulane대학과 같은 다른 대학들도 MIT의 뒤를 이어 4년제 과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교과 과정은 지난 100여년 동안 축적되어 온 화학 지식을 응용하는 일을 할 직업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화학 부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위와 같은 취지로, 그들은 데이비스의 청사진을 따라 -대담하게도 공학측에 중점을 두고- 기계 공학과 공업 화학을 배합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화학공학은 화학 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마춤옷일 뿐이었다. 19세기 말 경, 이러한 필요성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크게 대두되었다. 제조업자들간의 경쟁은 몹시 치열했으며 , 모두 "생산원가를 절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몇몇의 지각없는 사람들은 화물발송직원을 매수하여 몰래 화학 오염 물질을 넣어 경쟁 회사의 제품을 떨쳐내려고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업자들 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화학공장 내부의 최적화가 요구되었는데 그러려면 연속 조작 반응기 (회분식 반응기에 반대되는 것), 미반응물의 회수와 순환, 생성물의 비용효과적인 정제 등이 필수 불가결하였다. 이는 다시금 배관 시스템(전통적 화학자들이 할 수 없었던)과 자세한 물리 화학적 지식(기계 공학자들이 알지 못했던)을 필요로 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화학공학자들은 빠르게 등장하며 점차 더 복잡해지는 화학적 조작의 설계와 운전을 모두 할 수 있었다.


Ⅲ.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2: 화학공학의 확립

1888년 이후 화학공학자들이 정식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공업에 있어서 화학공학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조차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화학공학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규정짓고 그들의 특성과 가치를 알림으로써 공업에 있어서의 영역을 천명해야만 했고, 1908년 6월, 미국 화학공학회(AIChE)는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화학공학이라는 직업자체와 마찬가지로 학회 또한 그 영역을 규정지음에 있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1876 설립) 강력한 (5000여명의 회원) 미국화학회가 이미 미국의 순수, 응용화학 두 부문 모두를 그들의 영역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AIChE가 설립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ACS는 내부에 "공업 화학과 화학공학 부문"을 발족시킴으로써 새로운 분야의 공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AIChE와의 노골적인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국 내 화학공학의 확립은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을 수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1. 독일의 화학공학자? "'Nein'! 이라고 말하다"

20세기 초반경 미국의 화학 공업의 빠른 성장은 실험실의 공정과 실제 크기의 공업적 제조사이의 간격을 메울 것을 요구했다. 독일의 유명 대학에서 교육받은 많은 저명한 화학자들이 이미 이의 해결방법을 찾고자 하는 시도와 실험을 해왔다. 독일인들은 19세기에 급속한 성장의 시기(세계 최대의 화학 강국이 되게한)를 겪었는데, 공업적 규모확장을 위한 독일인의 해결책은 화학자와 기계 공학자의 협력 연구를 통해 실험대에서 공장까지의 전반적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방법이 연구 전문 화학자를 공학적 실무라는 고된 일에 묶어두지 않음으로써 창조적인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규모 확장의 방법 때문에 독일에서 화학공학자는 화학자와 기계 공학자로 대치되어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화학 공업은 몇가지 면에서 독일의 공업과 기본적으로 달랐다. 독일의 공업이 정밀 화학 약품이나 복잡한 색소 (화학자들에게 친숙한 회분식 반응기에서 만들어짐)에 정통한 반면, 미국의 공업은 황산이나 알칼리 (둘 다 화학자들이 거의 사용해보지 않은 연속식 반응기에서 만들어 짐)와 같이 단순하지만 널리 사용되는 몇 가지의 화학 약품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런 화학 약품들은 간단한 화학적 원리을 이용하여 제조되었으나 매우 큰 규모의 복잡한 공학적 기술을 요하였다. 미국의 화학 반응기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큰 그릇이 아니었으며 화학과 공학이 불가분하게 작업해야 하는 복잡한 배관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생산면에 있어서 화학과 공학은 독일에서 처럼 쉽게 따로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학공학자는 독일에는 그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1960년 까지 없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화학공학자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원조

초기에는 독일의 예를 따랐던 미국의 화학 산업은 - 후에 화학공학자의 고유 영역이 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 화학자와 기계 공학자를 고용하였다. 그러나 이 두 나라의 화학자들은 전적으로 특성이 달랐다. 독일에서 고용되었던 것과 같은 저명한 연구 전문 화학자들은 미국에는 1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의 화학 산업에는 재료 시험과 품질 관리 등의 일을 하던 분석 화학자들과 설계, 건설, 고장 발견 수리 등의 일을 하던 공장 관리자, 화학 고문들로 이루어진 몇몇의 생산 화학자들이 종사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의 화학자가 높이 칭송받았던 것과는 달리 미국의 화학자들은 그들이 종사하던 화학 산업에서 거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분석 화학자들은 기계공, 도안공, 혹은 요리사와 같은 등급으로 취급받는다" 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낮은 평가는 1905년 미국 분석 화학자들의 주급이 숙련된 기술공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드러난다.

20세기초에 화학자로 자칭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기는커녕 - 관리와 공학에 좀 더 근접하게 종사하던 - 많은 생산 화학자들은 그들의 직함에서 "화학자"라는 단어를 떨쳐 버리기를 열렬히 원했다. 비록 생산 화학자들이 분석 화학자들보다는 더 존중을 받았고 임금도 많긴 했지만 그들은 전체적으로 화학자들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했던 것이다. 어떻게 제조업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의 - 상대적으로 - 높은 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이 그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 - 임금 - 이었다. 대책에 대한 요구가 시급한 때였다. 그 해결책으로 생산 화학자들은 그들 자신을 화학공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그러했으므로) 그들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협회를 결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3. 화학공학회의 태동

화학공학협회의 설립은 정규 교육을 하게 되기 꼭 10년 전인 1880년, George Davis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Richard K. Meade가 1905년의 사설에서 미국화학공학회에 대해 최초로 진지하게 제안하였다. 그는 학회가 화학공학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화학산업에 있어 기계 공학자들 대신 화학공학자들이 공장을 설계하고 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의견은 그럴 듯하게 들렸음에 틀림없다. 1908년 그러한 기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미국 화학공학회(AIChE)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강력하고 영향력 있던 미국화학회는 AIChE가 설립되던 1908년에 30주년을 맞이했으며, 거의 5000 명의 회원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학계의 거인은 이후로는 학회로부터 더 이상의 분파가 생겨나는 것을 막겠다고 최근 들어 공표한 상태였다. ACS는 각각 1902년과 1904년에 ACS에서 떨어져나간 전기 화학자들과 피혁 화학자들에 의한 연속되는 문제로 인해 민감해져 있었다. 이 두 그룹은 각자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학회를 설립함으로써 ACS를 난감하게 했었다. 이 때문에 화학공학자들 역시 도약을 준비하려는 듯이 보였을 때 (더구나 많은 수의 응용 화학자들이 함께 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므로) ACS는 재빨리 "공업 화학과 화학공학 부문"을 만들어 대응을 했던 것이다.

ACS와의 직접적인 충돌의 가능성에 당면하여 AIChE는 경쟁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행동 노선을 결정했다. 이런 보수적인 행동 방침은 회원수의 증가는 더디게 했을지 몰라도 화학공학자와 화학자가 경쟁보다는 협동을 하도록 하는데 확실한 도움을 주었다.

4. 직업의 경계

화학공학자들이 직면하게된 또 다른 난제는 화학공학자는 어떻게 정의되며 어떤 면에서 유일한가하는 것이었다. AIChE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는 화학공학자들이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있는 공업적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화학공학이라는 분야를 규정지을 수 있는 확실한 한가지 방식은 그 구성원이 받은 정규 교육에 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AIChE는 교육 사업을 평가하고 향상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들은 제각각이고 가변적이던 화학공학 교육을 표준화하는 데 노력했다. 그들은 어떻게 교육을 개선했을까? 화학공학자들이 각각의 오래되고 다양한 제조 역사를 가진 수많은 공업용 화학 약품에 대한 공업 화학을 배우던 그 시대에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화학공학 교육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까?

해답은 1915년, MIT의 학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Arthur Little이 다른 모든 분야와 화학공학을 구별하고 화학공학 교과 과정에 공통적인 초점을 맞춤에 있어서 "단위 조작(unit operations)"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5. 단위조작

값싼 원료를 고가 생산품으로 바꾸는 동안 화학공학은 이 변형을 위해 필수적인 물리적, 화학적 조작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이 조작의 예로는 : 여과, 건조, 증류, 결정화, 분쇄, 침강, 연소, 촉매 작용, 열교환, 압출, 피복 등등이 있다. 이 "단위 조작"들은 공업 화학의 실제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화학공학적 지식을 체계화하는 데 편리한 방식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어떤 단위 조작이 일련의 물질을 제어하는데 관련하여 얻어진 지식은 다른 물질에도 쉽게 응용될 수 있었다. 그 단위 조작이 알콜을 독한 술로 증류하는 것이든 석유를 가솔린으로 증류하는 것이든 기본 원리는 같은 것이다!

"단위 조작"이라는 개념은 조지 데이비스가 여러 주제에 관한 그의 12개의 강의원본을 체계화하기까지는 화학공학 분야에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화학공학자를 유사한 직업과 구별해 주는 "단위 조작"의 잠재력을 처음 깨달은 사람은 Arthur Little이었다. 기계 공학자가 기계 장치에 주의를 기울이고, 공업 화학자가 제품에 관심을 갖고, 응용 화학자가 개별적인 반응을 연구할 동안 아무도, 화학공학자가 그러기 전까지는, 화학 제품, 반응, 기계 장치 모두와 연관되는 공정에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다. 단위 조작이라는 개념적인 도구를 이용하는 화학공학자는 이제 미국의 화학 제조업자들에게 그들의 특성과 가치를 증명함으로써 산업에 있어서의 영역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6. 교육의 표준화

"단위 조작"이라는 개념이 화학공학의 교과 과정을 표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22년의 한 AIChE 보고서는 ("단위 조작" 개념의 "창시자"인 Arthur Little이 필두에 있는) 표준화가 지속적으로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명명법, 교과 과정의 배치, 그 가치 등에 대한 만성적인 불일치 때문이었다. 다시금 AIChE는 교과 과목의 일치와 질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단체 중에서는 최초로 인증제도(accreditation)를 이용하였다. AIChE의 대의원들은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화학공학과들을 평가하였으며 1925년에 이 노력은 최고조에 달해 14개 학교가 최초로 인증을 얻게 되었다. 이는 화학공학 교육을 통합, 정리하고 증진시키는데 매우 효과가 커서 다른 공학 분야들도 서둘러 이에 동참하였으며(1932년까지) 이는 후에 공학과 기술을 위한 Accreditation Board (ABET)가 되었다.


Ⅳ. 화학공학과 그 기술의 역사 3: 공헌의 세기

백여년 전 화학공학이 처음 뚜렷한 개념으로 정리된 것은 영국에서였으나 교육적으로나 산업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초기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후에 화학공학은 공업 화학의 유산을 바탕으로 단위 조작 개념에 힘입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화학공학의 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물질 및 에너지 수지, 열역학, 화학반응속도론 등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의 화학공학에 근접하게 되었고 화학반응기 모델링과 이동현상에 대한 더 세부적인 조사를 하게됨에 따라 수학적 능력이 강조되면서 계속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 갔다. 또한 공정자동화에 필요한 컴퓨터 능력은 오늘날 화학공학자들이 더욱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러한 교육적 강조사항의 변화는 화학공학자가 변화하는 산업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그리하여 사회에 기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화학공학의 광범위한 학문적 배경은 오늘날 촉매 작용, 콜로이드 과학, 연소, 전기 화학공학, 고분자기술, 생물공학 등과 같은 많은 분야간 영역에 기회를 제공하였다. 화학공학의 미래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지속적인 추세에 따르는 듯하다.

1. 1차 세계 대전

(1) 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상황: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그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한 지방)의 수도, 사라예보의 거리에는 Francis Ferdinand 대공과 그 부인 Sofia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때 Gavrilo Princip라는 한 젊은 학생이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대공과 그의 아내를 암살하였고, 이를 세르비아에 의한 흉계라고 짐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를 포함) 전쟁을 선포하였다. 1914년 말엽, 유럽은 1차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전투 속에 휩쓸리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독일은 유기 화학과 화학 기술에서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였다. 1905년 당시 미국은 유기 화학 공정에 있어 독일에 50년 가량 뒤져있다고들 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화학과 화학공학 교수들은 대부분 독일의 대학에서 교육받았으며, 최근의 화학적 진보를 따라 잡기 위해서는 활용중인 지식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일 정도였다. 모든 미국 화학 공업은 황산과 같은 몇몇의 대량으로 필요한 화학 제품들에만 집중되어 매우 한정적이었다.

(2) 미국의 기회: 유럽에 전쟁이 휘몰아침에 따라, 미국은 독일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영국의 봉쇄선으로 인해 독일에서만 생산되는 값비싼 염료와 약품들이 미국에 상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갑작스레 미국의 화학 공업은 외국과의 경쟁없이 화학 약품 시장에 들어서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화학공학자들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전적으로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받은 교육은 주로 공학적 실례와 공업 화학에 관한 지침들이었다. 현존하는 화학 공정에 대한 이러한 암기는 이미 지어진 화학 공장들을 감독하는 데는 좋지만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닥쳤을 때는 매우 불리했다.

이런 문제거리에 직면하여 일련의 화학약품에 관한 기술적인 지식을 어떻게 다른 공정에 적용시킬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1915년 Arthur Little이 "단위 조작"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드러난다. 이 개념을 가지고 화학공학자들은 화학 공정에 대해 좀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배우게 된다. 그들의 전문지식이 점차 복잡한 실제 화학약품들로부터 독립되면서 새로운 산업은 급속히 조직되어 갔다. 교육이 산업의 요구에 응답한 것이다.

(3) 전쟁 산업: 1917년, 몇 척의 배와 수많은 목숨을 잃고 난 후에 미국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미국 정부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화학자와 화학공학자들이 - 많은 유럽 국가에서처럼 - 참호 속에서 죽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한 병적에 편입되었다. 공동의 적에 의해 갑자기 단결하게 된 미국의 화학 산업계는 경쟁 대신 협력을 시작했고 이 협업을 통해 전쟁에 승리하는데 기여한 폭약(과 비료)을 생산하는 암모니아 공장을 세웠다.

2. 2차 세계 대전

(1) 전쟁의 재개: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를 침략했다. 8년 후인 1938년 9월 1일에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함으로써 전쟁은 다시 유럽 대륙을 뒤덮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악명높은 진주만 폭격으로 인해 미국은 다시 한 번 세계 대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2) 합성 고무: 전쟁에 있어서 고무의 중요성은 1차 세계 대전, 독일에 의해 입증되었다. 독일인들은 영국의 봉쇄로 인해 외국으로부터의 고무 공급을 차단 당했었다. 고무가 없었기 때문에 트럭의 타이어는 바닥이 났으며, 군대는 군화의 부족을 겪었다. 독일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합성 고무에 관한 실험을 시작하였으나 만족스럽게 제 기능을 하거나 충분한 양을 생산할 만한 구조의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시에, 일본은 재빨리 극동 쪽의 고무 생산국들을 점령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은 천연 고무 출처의 90%를 잃었다. 졸지에 미국은 40여년전 독일이 처했던 것과 같은 달갑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았던 새로운 교육덕분에 미국의 화학공학자들은 합성 고무 개발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물질과 에너지 수지, 열역학(30년대에 강조되었던)과 결합된 단위 조작의 개념은 합성 고무 공장의 빠른 설계, 건설, 가동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제 화학공학자들은 산업을 일으키는 훈련을 철저히 받은 것이다. 정부의 지원금으로 화학 산업은 합성 고무의 생산을 100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 합성 고무는 타이어, 개스켓, 호스, 부츠 등 전쟁에 기여하는 모든 물품에 사용되었다.

(3) 고옥탄가 가솔린: 독일의 탱크와 폭격기가 Blitzkrieg작전을 써서 유럽을 휩쓸었을 때, 2차 세계 대전이 고도로 기계화된 전쟁이 되리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연합군은 고품질의 가솔린을 다량 공급해야 하는 탱크, 전투기, 폭격기 등을 필요로 했고 이 연료를 공급하느라 미국의 석유 산업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940년 Standard Oil Company (Indiana)에 의한 접촉개질(catalytic reforming)법의 개발로 연합군은 유리해졌다. 이 개질 공정은 저급 석유로부터 고옥탄가의 연료를 만들어 냈다.(톨루엔으로 TNT를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더 좋은 연료로 인한 우세한 성능으로 연합군기는 설계면에서 앞선 독일 폭격기와 겨룰 수가 있었다.

(4) 원자폭탄: 1900년대 초기에 과학자들은 원자에 대해 탐구하느라 분주했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이론(E = MC2)은 물질이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39년까지 많은 과학자들은 우라늄 원자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몇몇은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1942년 Fermi와 그의 동료들은 시카고 대학에서 최초로 인위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이 성공은 핵무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곧 맨해튼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일찍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기술적인 문제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1942년 말, Leslie R. Groves장군은 Du Pont사에 접근하여 플루토늄 제조공장을 짓고 가동시켜줄 것을 부탁했고 회사는 도전을 받아들였으나 이는 일급 비밀이었으므로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일의 전모는 알지 못했다. 이후 3년에 걸쳐 Hanford Engineering Works가 화학공학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설되어 가동되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장비들을 매우 서둘러서 설계하고, 제작하고, 시험해야 했다. 플루토늄 원자로를 원격 조정 처리하고 제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고장난 장비가 방사능을 띤 경우 그것을 고치기 위한 원격 조정 수리 장치도 필요로 했다. Hanford공장은 크고, 복잡하였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을 다루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 공장은 사람들이 화학공학자들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겉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문제라 할지라도 화학과 공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신속하고, 정확하고, 경제적이고, 안전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3. 전후 성장

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의 화학공학자들은 새로운 시설을 짓고 운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전쟁 이후 미국의 화학 산업은 변함없이 생산에 박차를 가했으나, 독일의 육중한 화학 산업은 황폐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독일의 화학 단지를 여전히 경계하여 히틀러의 거대한 I.G. Farben을 BASF, Bayer, Hoechst등의 새로운 세 회사로 분할해 버렸다.

외국과의 경쟁은 거의 없이 미국의 화학 산업은 화려한 도약을 계속하였고, 석유는 산업의 기반이 되어갔다. 연료와 플라스틱에서부터 정밀 화학 약품에 이르기까지, 석유는 그 중심부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1,2차 세계 대전은 석유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일 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석유산업의 성공은 화학공학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세계 화학 기술을 확고히 주도해감에 따라 화학공학 교육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화학 기술의 최신 정보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의 기술 잡지를 입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정보를 만드는 것이 되었다. 화학공학은 공학적 전통보다는 과학에 점차 촛점을 맞추어 가고 있었다.

4. 오늘날의 여러 전문 분야 협력

최근 화학 산업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석유 가공의 주된 공학적 문제점들이 대부분 극복되었고, 석유는 일용품이 되어 갔다. 이는 석유 산업에 있어서 공학자들의 고용 기회가 극히 드물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화학 회사 셋은 BASF, Bayer, Hoechst이다. (미국 정부의 경계는 괜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

그러나 화학공학 교육의 강력한 과학적, 수학적, 기술적 바탕은 여러 분야들 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게 해 준다. 커다란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생물공학. 전자공학, 식품 가공, 제약, 환경정화, 생의학적 이식 등이며 이들 모두 화학공학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최근의 화학공학 교육의 중심은 이러한 기회를 실현하는 일을 돕는 데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한번, 화학공학 교육은 공업적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응답을 한 것이다.


Ⅴ. 오늘날의 화학공학

1. 화학공학이란 무엇인가?

화학공학은 물질이 화학적 또는 물리적으로 변화하는 공정을 포함하는 산업과 그 외 다른 부문들을 다루는 기본적인 학문 분야다. 화학공학의 특성은 생산 수준의 화학 반응에 관한 업무라는 것이다. - 어떤 때는 하루에 수천톤에 이르기도 한다! 화학공학에 컴퓨터, 생물 공학, 온도와 압력의 극한 조건, 전자 제어 시스템, 고급의 재료 등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는 그리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화학공학은 대체로 원료를 알맞은 상태로 준비하고, 반응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증류나 그와 유사한 공정을 이용하여 생성물을 분리, 정제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결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냄으로써 원료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한다.

2. 화학공학자가 하는 일

졸업 후 화학공학자들은 종종 공정 산업의 "의사"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문제점을 진단하고, 더 나은 실행 방법을 추천하고, 공정의 질을 높이는 데 관련한다. 이는 졸업생들이 빠른 시간 내에 공정에 대해 아주 값진 경험을 쌓게 해 준다. 그들은 대형 공장의 건설을 감독하고 그러한 공장의 가동과 제어를 담당한다.

그들은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때로는 작업을 개선하기 위해 공장을 설계한다.

그들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되며 종종 고위 경영직으로도 근무하게 된다. 주된 활동은 아니라 하더라도 때로는 연구 개발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한 자주 해외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에 있어서 화학공학자들은 지출 비용, 생성물의 가치에 비한 원료와 인적 자원의 가치를 고려해야만 한다.

3. 화학공학자가 종사하는 산업

대부분의 화학공학자는 자동 제어하의 연속적인 흐름 공정에 의해 제품을 만드는 산업에 종사하게 된다. '화학' 공학자라는 이름은 이런 유형의 공학이 처음 나타난 것이 화학 산업이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1) 화학 약품과 의약품 : 비료의 생산은 일주일에 수천 톤에 이르는 대규모 화학 생산의 한 예이다. 반면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이는 몇몇의 의약품은 한 번에 몇 킬로그램씩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2) 음식물 : 냉동 건조는 화학공학자가 식품의 보존에 기여한 것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제빵과 양조는 화학공학적 원리가 그 핵심이 되는 제조 공정들이다. 동물 사료와 사람의 건강 보충식으로 쓰이는 합성 단백질은 이제 석유를 주성분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3) 석유, 석유 화학 제품과 플라스틱 : 화학공학적 공정에 의해 정제된 연료와 윤활유는 오늘날의 운송에 있어 기초가 되며 인조 섬유, 이에 색을 입히는 염료, 합성 세제, 광범위의 플라스틱등도 석유 관련 산업에 의해 제조된다.

(4) 금속 : 화학공학자들은 철과 같이 전통적인 금속이나 티타늄과 같이 새로운 금속을 얻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였다. 선철을 강철로 바꾸고, 보오크사이트로부터 알루미늄을 얻고, 구리를 정제하는, 이 모든 일들은 화학공학 공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5) 에너지 : 지금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석유는 미래의 어느 때엔가 희박해질 것이고 그 때 화학공학자들은 대체 연료와 에너지 자원 (곡물에서 알콜을, 이암과 석탄에서 기름을, 페기물에서 가스를 얻고, 태양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등)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6) 공장 설계와 건설 : 어떤 화학공학자들은 다른 화학공학자들이 조작을 할 수 있도록 전세계적으로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국제 계약자를 위해 일한다. 이런 영역에서 일하는 공학자들은 개발 도상국과 선진국들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

※ 일반 부문

(1) 설계 공학자(Design Engineer)들은 규모와 작업 온도, 압력, 설비의 각 단위에 따른 유속등을 결정하고, 완벽한 공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대체로 컴퓨터 모델을 이용하여 위의 사항들의 상호 관련을 연구한다.

(2) 기획,설계 공학자(Project Engineer)들은 새로운 공장의 건설을 시작부터 끝까지 관리한다. - 약 2년 가량 걸린다. 그들은 과학자, 제도공, 다른 공학자, 공급자, 회계사들과 대등하게 일한다.

(3) 생산 관리자(Production Manager)들은 필요로 하는 제품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책임이 있다. 그들은 원료와 인적 자원, 에너지 사용, 설비 보수, 노사 관계 등을 조정한다.

(4) 제어 공학자(Control Engineer)는 설계와 기계 설치, 공장 제어 시스템을 전문으로 다루며 컴퓨터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다루기도 한다. 이들은 디자인, 프로젝트, 플랜트 엔지니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일한다.

(5) 플랜트 엔지니어(Plant Engineer)는 생산 관리자에게 기술적인 지원을 해 준다. 이들은 문제 해결과 개선, 수정 등의 일을 한다.

(6) 연구 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공학자들은 더 싸고, 더 효율적으로 원료와 에너지를 더 적절히 사용하여 제품을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 R & D 공학자는 대부분 대학원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다.

※ 화학공학이 맞닥뜨린 도전 - 새로운 분야

즐겁고 만족스러운 직업을 가지기 위해 삶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화학공학이 맞고 있는 몇 가지 도전 분야는 다음과 같다.

(1) 식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토양을 위한 영양분과 농작물의 손실을 감소시켜줄 제초제, 살충제가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식량 자원의 심각한 불균형은 합성 식품으로 원조받을 수 있으며 전 세계의 단백질 요구 또한 생물 화학공학의 기술을 이용한 합성으로 충족될 수 있다.

(2) 에너지. 1970년대에는 에너지 보존을 강조하던 몇몇 국가의 합의된 행동에 의해 국제 석유 가격은 1100%나 올랐다. 화학공학자들은 산업의 여러 영역에서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책임이 있었다.

(3) 환경은 보호되어야만 한다. 미래 세대의 환경은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화학공학자는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깨끗한 기기를 설계하고 조작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호하는 데 일조한다. 무연연료로 동작되는 자동차에 설치된 무공해 기기는 화학 반응기이며 화학공학자들은 더 좋은 촉매 반응기를 개발하기 위한 선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4) 컴퓨터는 거의 모든 공장, 상점, 사무실에서 사용된다. 아마도 여러분은 학교에서나 비디오게임의 일종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화학공학자들은 컴퓨터를 만드는 일과는 상관이 없지만 다가오는 많은 도전들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어느 정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공장이 화학공학자의 교육, 경험과 더불어 다양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설계되고 그리하여 효율을 높이게 된다.

※ 그 외의 분야

화학공학 교육의 다재다능함은 비전문 분야에서의 화학공학자에 대한 수요를 보면 알 수 있다.

(1) 재정. 화학공학 교육은 경제적 분석 능력을 발달시켜준다. 다양한 공정 산업에의 확실한 이해와 함께 이 능력은 머천트 뱅크(주 : Merchant Bank - 환어음 인수, 사채 발행을 주업무로 하는 금융 기관), 보험 회사 또는 다른 재계 기구에 화학공학자가 프로젝트 분석가로써 고용될 수 있도록 해준다.

(2) 경영업무. 경영에 있어서의 결정은 종종 기술적인 문제, 시장의 상황, 최적화 등을 포함한 불확실성 때문에 복잡하다. 화학공학자들은 그들의 분석적 능력을 사용하여 논리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불확실성에 달려드는 데 적격이다.

(3) 인사. 많은 회사의 인사 담당계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기술적인 배경도 갖추고 있는 화학공학자들이 맡고 있다.

(4) 판매. 공정 산업으로 부터 생산된 제품은 국내외 모두에서 판매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장의 기계나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도 판매를 를 필요로 한다.

(5) 약품. 생물 의학 산업은 규모는 작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몸은 복잡한 화학적, 물리적 공정을 포함한 공장과도 같으며 화학공학자들은 인공 기관, 혈액 순환의 문제, 소화 시스템, 그리고 - 당연히 - 의약품 생산에 대한 연구 개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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