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노지의변 本能寺の変]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배신한 이유는 무엇인가?

칼럼/칼럼|2023. 1. 1. 09:00

목차

1. 개요 

2. 아케치 미쓰히데, 그는 누구인가?

3. 혼노지의 변의 여러가지 설 (說)

1) 원한 설

2) 야망 설

3) 시코쿠 설

4) 공포심 설 

5) 여러 무장 설

5-1) 쇼군지령 설

5-2) 조정 지시 설

5-3) 여러 무장의 흑막설

6) 예수회 음모설


1. 개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그는 수백명의 다이묘(大名)들이 일본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100년 동안 전쟁을 펼친 ‘전국시대’에서 최종 승자의 지위를 굳혀가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미쓰히데는 왜 히데요시를 지원하지 않고 20년간 충성을 바쳐온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그 원인은 434년이 지나는 오늘날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교토의 사찰 혼노지(本能寺) 1582년


2. 아케치 미쓰히데, 그는 누구인가?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1528-1582)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는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다.
통칭은 주베에(十兵衛), 아버지는 아케치 미쓰쓰나(明智光綱)라고 알려져 있다. 

미노 아케치 성주로서 사이토 도산의 가신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여러 영지를 돌아 다녔으며, 뒤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한다.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자결케 한 인물로 유명해진 무장이다.


3. 혼노지의 변의 여러가지 설 (說)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가나를 배신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을 살펴보자.

 

1) 원한 설
아케치가 노부나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주장.

1.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접대하다가 그만 악취 나는 물고기가 나오는 바람에 노부나가가 노하여 이에야스의 접대 임무에서 해임되고 체면이 구겨졌다는것. 분노한 아케치는 그릇을 연못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2. 아케지의 영지를 내주고 아직 복속되지 않은 지역인 이즈모, 호키, 이와미로 영지를 옮기라고 명령받은 것.
3. 야카미 성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위해 숙모를 죽게 한 것.
4. 다케다 가문을 토벌한 뒤 축하 잔치에서 "저희도 애쓴게 있습니다."라고 하자

노부나가가 "이 새끼야, 네가 뭘했는데!"라고 면박을 당한 것.
5. 사카모토 성을 몰수당한 사건.


2) 야망 설
전국 시대 연구의 대가인 타카야나기의 주장으로, 그는 원한설의 근거로 제기되는 사항들이 후대에 부풀려지거나 억측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프로이스의 "일본사" 기록을 근거로 합리적인 성격인 미츠히데와 노부나가가 서로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3) 시코쿠 설
미츠히데가 시코쿠 원정을 피하기 위해 모반을 꾀했다는 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에게 시코쿠의 쵸소카베(長宗我部) 가문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츠히데는 자신의 가신인 사이토 토시미츠의 여동생을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혼인을 맺게 했다. 이로 인해 사이토 토시미츠와 쵸소카베 가문은 인척 관계가 되었고 미츠히데와도 연줄이 닿은 상태였다. 

한편 초소카베 가문의 아와 침공에 저항하다 성을 내주고 항복한 미요시 야스토시의 아버지 미요시 야스나가(자신은 가와치 슈고다이로 있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해 오다 가문을 섬기고 있었다)는 하시바 히데요시와 연결해 시코쿠를 되찾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미츠히데는 쵸소카베 가문을 앞세워서 시코쿠를 통일해야 한다고 노부나가에게 진언했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582년 2월, 미요시 야스나가와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교토로 올라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를 거부하자 시코쿠를 무력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간베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삼아 시코쿠 정벌에 나서게 했다.

다시 말해서 미츠히데의 시코쿠 정책이 노부나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미요시 야스나가가 먼저 선봉으로 시코쿠에 들어가고 노부타카 등이 이끄는 본대가 6월 2일 오사카에서 출진할 예정이었다. 미츠히데는 이를 막기 위해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 이 설의 핵심이다.


4) 공포심 설 
미츠히데가 앞날이 어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모반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주장.

미츠히데는 사실 오다 가의 고유 가신도 아니었고, 노부나가 밑에 있은지도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가신 중 신참자였다. 그럼에도 미츠히데는 가신들 중에서 상당히 중용되었는데 미츠히데 자신의 능력이 있기도 했지만 노부나가의 신임이 컸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580년, 노부나가가 여러 가신들을 내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미츠히데는 내쳐지지는 않았으나 노부나가의 신임을 점점 잃어가는게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들었고 이 때문에 모반을 일으켰다는 것이 초조설의 핵심이다. 

대체로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던게 아닌가에 대한 사항으로 꼽히는 것들은 이렇다.
1. 노부나가에게 시코쿠 정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2.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복속되기 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아시카가가 추방된 이후에 노부나가의 심중에 미츠히데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


5) 여러 무장 설
5-1) 쇼군지령 설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무로마치 막부의 옛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자신의 원래 가신이었던 미츠히데를 사주하여 노부나가를 쳤다는 설. (후지타 타츠오(藤田達生) 교수 주장))

5-2) 조정 지시 설
노부나가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미츠히데를 사주했다는 설.

노부나가는 태정대신, 간파쿠, 정이대장군의 어떤 직책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사네히토 친왕의 서찰을 받고도 이에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냈었다. 조정의 의도는 노부나가가 쇼군 직을 원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서찰을 보낸 것이었지만, 노부나가가 답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노부나가가 이전의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같이 바쿠후의 쇼군 직에 만족하지 않고 조정을 토벌하려 하는게 아닌가라고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

5-3) 여러 무장의 흑막설

하시바 히데요시 설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흑막이라는 설.

히데요시는 주고쿠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상황은 모리 가문이 매우 불리한 처지였기 때문에 빗추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보낼 병력은 1만 5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과연 히데요시가 구원병을 요청할 이유가 있었나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혼노지의 변의 소식을 듣자마자 타카마츠 성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그리고 모리 가문과 화해한 뒤 전력을 온전히 보전하여 귀환했다. 11일만에 대군을 이끌고 귀환했다는 점, 혼노지의 변 이후 한달도 안되는 기간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키요스 회의에서 1인자로 서게 된 점을 들어 사전에 미리 모의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흑막설을 주장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흑막이었다는 설.

역사학자 아케치 켄자부로(明智憲三郎, 1947~)가 주장하는 설.

이 사람의 주장으로는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후 명나라 원정(唐入り)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변을 일으켰다는 것. 변을 일으킨 결정적인 방아쇠는 주고쿠 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이에야스 암살 작전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가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었고, 이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변이 터지자마자 회군하는 바람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결과적으로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6) 예수회 음모설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획책하여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는 설.

 

노부나가와 십자가 (슈에이샤신서)(타치바나 교코)(立花京子) 원제 : 信長と十字架―「天下布武」の眞實を追う (集英社新書)

타치바나 교코(立花京子)가 "노부나가와 십자가"라는 책에서 제창한 설로

조선과 명나라 등 아시아의 침략을 꾀하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꾀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이다. 

 

이설은 "오다 노부나가 정부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고 되어 있다. 

예수회는 노부나가의 후원자 였는데 노부나가가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 확장 정책 의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또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자 예수회는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우려해 기리시탄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를 앞세워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예수회 흑막설의 근거로 제기되는 것은 미츠히데가 가톨릭 교인이었다는 것

예수회가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미츠히데가 그리스도 교인이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다. 

미츠히데가 사용한 문장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이고

딸 타마코와 가신인 타카야마 우콘 등이 가톨릭 교인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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